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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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현실 감각이 모자라는 낭만주의자. 그래서 그토록 방황했었다.' (p.75)

최영미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며 또 집을 떠난다. 별 하나에 깨끗한 방이 있길 바라면서, 길에서 예기치 않은 만남을 기대하면서. 뻔뻔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대책없이 떠나고 본다. 그런면에서 최영미 시인은 얼마쯤의 현실 감각을 빼놓고 다니는 사람. 그러나 길에서 만난 낯선 여인과 친구가 되고, 용감하게 모르는 길, 모르는 음식에 부닥친다. 여지없는 낭만주의자. 그 철없는 여행의 기록을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문학동네.2009)에 모아놓았다.

 

여행의 기록이지만 작은 디지털 카메라 하나 가지고 다닐 부지런도 없던 그녀의 여행기에는 사진이 별로 없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건 그녀의 문화적 소양과 자신의 표정. 여느 여행에세이와 달리 이 책에서 독자들은 많은 예술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짤막한 해설도 곁들여서. 시인답게 풀어낸, 그림이 그려질듯한 묘사 속에서 독자들은 여행지 뿐 아니라 그녀의 안달복달한 모습, 난처해하는 표정도 볼 수 있다. 자신을 글 안에 오롯이 풀어낸다는 것, 그걸 독자로서 경험한다는 것, 그건 작가와 독자만이 갖는 특별한 공유의 감정이다.

 

하나의 여행에 대한 이어진 기록이 아니기에 이야기는 동분서주한다. 프랑스에 있는가 하면 독일에 있고, 어느새 그녀의 기억은 도쿄의 바위정원에 가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여행지를 감싸안는 하나의 틀이 있으니 좋아하는 장소, 사람들에 대한 열정이다. 가지않으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은 간절한 여행.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닌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던 여행들이다보니 글에서 흥분이 묻어난다. 오죽하면 그냥 그런 점을 얘기하는 순간에도 투정부린다는 느낌이 들까.

 

이어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가들을 훑는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작품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독설을, 눈한번 깜빡이지 않고 날려준다. 그러나 존경하는 선배님 얘기를 할 때의 수줍어하는 모양은 영락없이 첫사랑에 빠진 여학생이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들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작가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편하게 써내려간 문장들 속에 그녀는 작은 주문들을 숨겨놓았다.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는가.' (p.72)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되겠지.' (p.133) 어떻게보면 체념하고 닥친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겐 여러 모습의 최영미를 거쳐 온 지금의 자신을 만족하고 아끼려는 긍정적인 주문으로 들렸다.

 

글 어딘가에서 최영미 시인은 이게 마지막 짐싸기이기를, 하고 바란다. 그러면서 작가 후기에서는 '힘들더라도 나는 모험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글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힘과 곁들여진 문화적 센스를 음미하고 싶다면 '신을 논하기보다 신을 믿는게 낫듯이, 사랑에 대해 떠드는 것보다 누군가를 몸소 사랑하는게 더 낫듯이'(p.220) 짧은 리뷰보다는 직접 그녀의 책을 만나는 게 낫다. 더불어 최근에 나온 <도착하지 않은 삶>이란 시집을 함께 권해본다. 무료한 오후를 졸깃하게 만들 책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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