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눈
장석남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경험한 만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읽는 나이에 따라 천차만별의 감상이 나올 수 있다. 일반 소설들도 그러한데 시는 오죽할까. 그 자체로서도 이미 수십가지의 해석이 가능한 열려있는 글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넓은 독서를 가능케하는 '경험으로 읽기'가 독서에 독이 될 때도 있다. <젖은 눈>을 읽을 때의 나와 같이 경험 부족자의 독서에 있어서는 말이다.

 

살가운 해석도 없다. 그저 독자에게 툭 하니 던져놓은 언어의 집합만이 마치 풀지못하는 수학 공식마냥 내 앞에 던져져 있다. 집중하려 소리내서 읽어봐도 단어는 마음 속이 아닌 허공을 떠돌 뿐이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두었다. 그리고 비 오는 토요일, 홀로 방에 앉아있다 구석에 박힌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내 고독에 친구가 되어주지 않으련? 이란 속말과 함께.

 

여전히 아리송하다. 아니, 아리송은 조금 알것 같을 때 쓰는 말이지... 모호하기 그지없다. 장석남이란 시인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무지, 그가 살아온 시대를 공유하지 못하는 무지, 그와 같은 나이대의 공감조차 갖지못한 무지, 무지, 무지. 그래서 결국 난 내 마음에 그의 언어들을 쑤셔넣는다.

 

그러다 마음이 이거 괜찮네라며 집어준 구절 하나가 눈에 박힌다.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시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은색 시집 같고.

부엌 中]

어려운 말, 내가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만 주르륵인가 싶더니 이런 편안한 시도 한켠에 숨어있다. 아, 이 사람 모를 말만 풀어놓는 영감이 아니구나 싶으니 이제부터 좀 더 많은 단어가 마음으로 행진하기 시작한다.

 

이제보니 장석남이란 이 시인 참 소박한 아저씨같은 인상이다.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다. 부엌을 저리 친근하게 그려내는 걸 보니 그러하고, 인생을 한낱 오동잎 너울거리는 모습으로 비유하는 걸 보니 그렇다.

[그렇지, 밤비 후득이는

오동잎이

우리 생이지

후득여도 너울대는 게

그게 생이야

소주 생각 간절한 밤비 속

우리 생이야

밤비 中]

 

그런데 이 소박한 분, 인생의 단맛 쓴맛 어느정도 쏠쏠히 맛보셨나보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 속에는 고독이 가득하다. 그런데 슬퍼 몸부림치는 그런 고독이 아니다. 인생에 이런 맛도 있어야지 싶은 유유자적한 고독이다. 외로움도 내 친구려니 하는 신선같은 태도랄까. 그래서 그의 글들은 외롭지만 슬프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산을 보곤 하는 것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봉지같이

비닐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

알았어도

다시 외로운,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없이 흔들리는

외로운 삶

자화상 中]

 

그리 지내온 삶이나 적적하게 옮겨적어놨나 싶었는데 어느 새 그의 글은 지난 사랑을 추억하는 장이 되어 있다. 문학청년이었을 그 시절의 풋풋한 소심함이 가득 담긴 시구를 보니 웃음이 풋 터져나온다.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中]

 

이 얼마나 소박하고 솔직하며 정직한 표현인지. 왠지 이 시인은 지금도 그 고운 표현 낳은 마음 그대로 지니고 있을 듯 싶었다. 그의 이런 고운 말장난은 시집 이 곳 저 곳에서 빛을 발하는데, 어딘가 메모해뒀다 아끼는 사람들 편지에 한 구절씩 넣어 보내고 싶게 만든다.

[파래진 창 모퉁이에

만간 손톱달이

갸글갸글한 숨결에 씻기고 있다

낯선 방에서 中]

 

시집이지만 마치 한 편의 조용한 수필집을 읽은 기분으로, 서툰 감상을 마친다. 책은 덮었는데 아직도 한참을 더 읽어야 할 듯한 기분. 언젠가 내가 그의 나이만큼 찰 때, 나의 경험이 지금보다 풍요로워질 때 다시 만나면 그 아쉬움이 좀 덜어질까. 그 땐 내 눈가도 촉촉히 젖어들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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