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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훔친 남자
후안 호세 미야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현대 주거 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단위를 꼽으라면 아파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대 생활에 맞게 편리하고 손쉬운 접근법에 의해 설계된 아파트. 그 특징 중 하나는 대칭성이다. 거울에 비친 듯 각자를 닮은 마주보는 두 집. 문에서 들어가서 작은 방, 정면으로 화장실, 한 쪽은 우측으로, 한 쪽은 좌측으로 안방, 그 반대편으로 부엌. 치밀하고 완벽한 거울상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럴까.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살고 있는 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다는 건가. 자신은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가.
유쾌하지 않은 질문을 내던지는 작가는 스페인권의 유망한 작가 후안 호세 미야스다. 그렇다. 이 책 <그림자를 훔친 남자>는 자신을 버리고, 부러워하던 이웃집 남자로 분해 사는 한 남자 훌리오의 이야기다.
아이가 없는 부부 사이에 자연스럽게 동화된 이웃집 남자 마누엘이 어느 날 사고를 당한다. 훌리오는 아내 라우라로부터 갑작스런 이혼 통보를 받고 집에서 맨몸으로 쫓겨난다. 갈 곳 없는 이 남자, 이제 빈 집이 된 이웃집으로 스며들어간다. 밝혀지는 사실들은 가히 웃으며 읽을 내용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묘하게 웃음을 자아낸다. 좀 더 솔직하자면 작가가 그려내는 그들의 이야기는 다소 웃기고, 별로 슬퍼 보이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도 덤덤히 시간을 보내는 훌리오는 무력한 현대인을 닮았다. 마누엘의 그림자를 훔쳤지만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하시시(담배)조차 제대로 못 피는 가련한 중생이여. 그는 마누엘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서도 그림자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모른다.
작가는 상당히 치밀하다. 단순히 큰 이야기 덩어리에서만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던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몇 개의 복선 -훌리오가 조카 훌리아에게 해 주는 그림자나라 이야기, 훌리오와 마누엘의 실체없음을 다루는 직업, 훌리오와 마누엘 집의 대칭성- 등을 통해 끊임없이 독자에게 주제의식을 주입시킨다.
이야기는 '나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내가 맞는가?'로 귀결된다. 얼마간의 시간동안 자신이 아닌 이웃집 남자로 살았던 훌리오. 그 때의 그는 훌리오 자신이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마누엘의 코롱을 뿌리고. 주거지에는 병원에 있어야 할 마누엘의 향이 감지된다. "너 같지 않아"라는 말을 들으며 마누엘의 옷을 입고 다닌다. 그 절정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누엘의 마지막 이메일을 통해 보다 극명해진다. 타인으로 분하는 그는 그 자신이 아닌 마누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성형수술로 비슷해지는 외모를 갖고 비슷한 집에서, 같은 상품을 사용하며 점점 비슷해지는 현대인들에게 유쾌한 경각심을 느끼게 해줄 책이다. 문득 위아랫집 혹은 앞집에서 나와 똑같은 방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를 따각거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난 달라 라고 외치고 싶지만 비슷해져 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에 심심한 위로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