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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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이라고 외쳤다. 
그렇다면 그에 가장 걸 맞는 사례는 십자군 전쟁이 아니었을까?
맹목적인 믿음이 보여주는 인류사에 있어 더없이 덧없었던 전쟁
그렇게 100년을 넘도록 이어진 십자군 전쟁의 승자는 
아편의 종말이 죽음이듯, 

원래의 그 자리 그대로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면서도, 
인류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수많은 오류와 오판 속에서, 
수많은 패배와 승리가 교차하는 전장 속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본래의 종교 전쟁을 넘어, 
각 문화의 전수자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해간다.

그렇게 십자군의 아이콘이자 전설이 되어버린 
사자왕 리처드가 활약했던 3차 십자군 전쟁이 지나가고, 
종교전쟁에서 경제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던 
베네치아의 4차 십자군 전쟁, 
중세시대의 균열을 예고하는 반동의 5차 십자군 전쟁
그리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외교전으로 진행된 프리드리히 황제의 6차 십자군 전쟁
더불어 마지막 십자군이자, 마지막으로서의 순수한 십자군이고자 했던 

프랑스 루이왕의 7차, 8차 십자군 전쟁으로 길고 길었던 십자군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즐거움은 이러한 십자군의 역사를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오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뒤집어보는 역사이기에 흥미롭다.

사자왕 리처드에 있어서 그의 십자군에서의 
눈부신 성과와 용맹함은 칭찬하지만, 
결국은 용맹함으로 자신을 상하게 하고, 
결국은 실지왕으로 불리고마는 
동생 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마는 어리석음은 
역사의 기묘한 우연이라고 할까?

더불어 오귀스트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는 
프랑스왕 필립2세는 십자군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었지만 
결국 프랑스의 남북 통일을 이끄는 주요한 업적을 남기었음은 
역사의 승자가 과연 누구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해상왕국 베네치아의 기반을 닦은 4차 십자군 전쟁은 
한 지도자의 헌신이 얼마만큼 그 도시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죽음이후의 화려한 칭송보다는 콘스탄틴노플에서 직위조차 새겨지지 않은 무덤가에 묻힌 도제 단돌로의 삶은 그래서 더욱 숙연하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서의 가장 큰 비극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5차 십자군 전쟁은 종교자체가 가지는 광기 속에 인간이 얼마만큼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소년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순수함 혹은 철없음을 어른들의 더러운 잇속으로 노예상에게 팔아버리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외교는 총성없는 전쟁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은 십자군 전쟁이 바로 독일황제 프리드리히가 이끌었던 6차 십자군 전쟁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칠리아라는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문명의 중립지역에서 자라난 지도자 프리드리히의 유연한 사고였다. 더불어 그는 당대의 세계인이자 지식인이었으며, 재능에 걸맞는 인재등용으로 종교의 차별 없이 이슬람교도조차 관료로 채용할 줄 아는 기독교 세계에서의 뛰어난 이단아였다. 

이에 교황은 잇따른 종교적 사형판결인 파문을 내렸지만, 그는 적재적소의 위협과 강화만으로 목표한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그렇게 당대에 있어서는 가장 가혹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십자군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의 위상은 후대에 있어 더욱 높이 평가받는 역설을 낳는다.

십자군에 명멸했던 수많은 지도자들, 그중에서는 다수의 순교자도 생겨났지만, 정작 성인의 반열에 오른 건 프랑스왕 루이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실로 파괴적이다. 

뛰어남과는 전혀 동떨어진 의미에서의 이 파괴는 그의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중근동의 기독교 세력의 방어력을 현격히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귀결된다. 더불어 프리드리히 만큼의 유연함이었다면, 승리가 담보되었던 상황에서도, 십자군으로서의 순수함을 강조하며, 승리보다 패배를 선택하는 그의 고지식함은 이슬람세력에게는 축복으로 바뀌어졌다. 그렇게 포로가 되고, 죽음조차도 십자군 원정 중에 맞이하게 된 그의 삶은 결국 교황에게서 성인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다분히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 책을 읽은 지도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십자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십자군을 응원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는 
친절한 교수님이 설명해주는 자상한 역사이야기와 같다.
누구의 판단이든, 누구의 행동이든 
방대한 자료에 기반한 실증과 그것이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전설과 민담이 섞인 흥미로운 가십을 꼭꼭 넣어주는 센스는 그가 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더불어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 무편무당한 역사가로서의 서술방식은 오랫동안 물든 서구우위의 오리엔탈리즘을 세탁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다.

로마인 이야기 이후에도 부단한 저술활동으로 
지혜의 갈증을 적셔주는 노작가 시오노 나나미
그분의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며....감사한 마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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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100년 - 오연호가 묻고 법륜 스님이 답하다
법륜.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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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통일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떠오르는 게 없다. 
그저 땅이 넓어진다. 금강산을 갈 수 있다. 자원이 많아진다. 
참으로 궁색한 상상력이다. 
그렇게 대륙을 노려보던 호랑이는
어느새 대륙의 눈치를 보는 토끼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연호 기자와 법륜스님의 대담 속 통일은 달랐다.
통일이 가지는 원대한 꿈 그리고 희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더불어 그것이 지난 시절 
독립군의 비장함과 산업역군의 피땀 어린 노력
그리고 민주투사의 용기로 
대변되는 억세고 힘들었던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는
어려운 일은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 통일의 밀알이라고 말한다.

그 첫째가 통일에의 설레임을 다시 가지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는 
통일이 과연 될까라는 의문부호 보다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무력감이 상존한다.
그 엄청난 비용을 과연 누가 그리고 어떻게 부담하느냐?

하지만 주판알만을 튕구는 머릿속에는 
통일에 대한 막연한 피해의식만 있을 뿐
진정한 통일에의 의미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

하나 된 민족으로의 역사에 대한 복원이 있고, 치유가 있어야지만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동안 중국에의 사대와 일본으로의 종속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굴종되어지고, 
굴절되어진 민족의식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것에 대한 진정한 치유는 통일이며, 
그것은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통일에의 진정한 이유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래야지만 
현재의 외따로 떨어진 남한만의 좁은 섬나라의식에서
벗어나, 세계를 경영할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법륜스님은 지난 역사속 이야기로 부터 우리에게 전해준다.

둘째로 상생과 화합을 이야기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그리고 산업화와 독재를 겪으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진
우리 시대의 갈등 구조속에서 통일로의 발걸음은
어느 한 사람, 한 세력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민족사적 대화합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대역사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앞서의 작은 일부터의 실천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통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 시대에 남은 우리 모두의 마지막 과업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는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지난 과거로부터의 체제경쟁을 위해 있었던
상처 모두를 통일에의 민족사적 씻김굿으로
화해와 용서를 주관함으로서 
미움과 증오의 씨앗이 남겨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지금 현재 통일에의 리더는 대한민국이라는 점을 말한다.
원명 교체기와 명청 교체기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우리의 조상은 
그에 대한 댓가로써 역사적 아픔을 너무나 값비싸게 치르어 왔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 
우리는 다시 한번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흥망이 교차되는 시점에 이르러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다가올 한.중.일 동북아 공동체의 주인공이 되느냐?
중국과 미국의 대척점에 선 백척간두의 광대가 되느냐?
그런 점에서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이라는 경제적 풍요
이미 앞선 국방력을 바탕으로한 자주안보, 
국민이 주인이 된 민주화의 가치를 우위로 
통일에의 주도권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자세로 
이끌어 가야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리되어진 세가지만 보아도 
통일은 쉽고도 어려운 길 그리고 헷갈리는 길이다. 
그리고 진짜 이 길이 이루어질까 의문스러움이 
다시 머릿 속을 찾아온다. 

그러나 지난 60년 동안 통일과 관련된 사람은 간첩이 되어지고 
빨갱이가 되어진 엄혹한 과거 앞에서 조차 스님은 결연히 말한다. 
통일이 밥을 먹여주고, 통일만이 민족이 바로 사는 길이다. 

그렇게 통일의병으로의 격문을 
사자후와 함께 토해낸 글 “새로운 100년”
출가에의 계기를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으며
1000년을 바라보고 살아라는 화두로 고민했던 스님의 글이기에
삼십년을 겨우 산 후학으로서 그 마음은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통일 그것은 먼 미래가 아닌 
바로 당면한 우리의 과제이자 
잊어서는 안 될 ‘천년의 꿈’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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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1 (반양장) -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학고재신서 31
유홍준 지음 / 학고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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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이 말은 추사에 관한

오늘의 현실을 딱 짚어준다.

게다가 단순히 조선 후기 명필 그 이상의 추사 선생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없다. 더군다나 추사체라는 괴벽한 한문 글씨를 이해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아는 만큼 다시 보인다는

단순한 이치를 다시 깨칠 수 있었다.

 

추사체가 왜 어린아이 글씨만큼이나 매부러진 모양새가 아닌지,

왜 그렇게 금석학이라는 옛 비석의 해독에 그렇게 매달렸는지,

그에게 학문이란 단순한 앎이 아닌, 실천의 과목이었고, 생활의 일부였다. 청나라 연경에서의 60일을 오롯이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평생을 조선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예술과 학문의 네트워크를 만든 일이며, 제주에서의 고독했던 9년의 위리안치에도 불구하고 꽃피어진 그의 글씨와 다듬어진 심미안은 조선을 넘어 진정한 세계인이었던,예술인으로서의 추사 김정희를 알게해준다.

 

더군다나 아내와의 사별을 애통해하며 지은 글에서

그의 인간된 다정다감함을 읽을 수 있었고,

명문 경주김씨 월성위 집안의 종손으로 그가 가졌던

귀족스럼 우아함을 알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남아 있던 그의 장서 대부분이

후대의 부덕함으로 불에 태워지고, 팔려나갔다는 사실은

역사를 자부심이 아닌 쩐으로 치부했던 슬픈 과거를

되새겨 준다.

 

그래서일까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위인을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구나.

 

겸재가 있었기에 동국진경이 있었다면

추사가 있었기에 동국진체를 가질 수 있게된

자랑스런 인물 완당 김정희...

 

그의 삶이 남아있는 서울 봉은사 板殿 과

그의 삶이 뭍어있는 세한도의 묵향이 더욱 그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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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뭔고 하니
권오문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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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한 답을 조금은 먼저 살고, 먼저 배우고, 
먼저 떠나간 분들에게 배워 듣는 자리...
역시나 답은 하나였다. "주인된 삶을 살아라!"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살 수는 없어도,
나만이 만족하는 삶은 살 수있다는 것!
그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한 종교지도자 17분의 삶 속에서
책은 이적을 말하지는 않지만 비움으로써 
모든 것을 얻은 선지식분들의 이야기를 수록해놓았다.

특히나 떠남에 있어 모든 것을 내어준 김수환 추기경의 이야기
자연을 스승으로 불도를 터득한 대행 한마음 선원장의 큰 마음
호흡을 통한 내면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은
공간을 넘어, 시간을 넘어 던져주는 오묘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더불어 기존 종교로서 혹은 신흥종교로서, 
이 땅에 발현한 종교인들 다수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신을 비우며, 자신을 낮추며,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는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운만큼, 낮아진 만큼, 내어준 자리는 
우연이든, 인연이든, 필연이든 그곳에 
다시 채워주는 누군가로 이어지는 묘법이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說하는 자리
그렇게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
그렇게 세상에 대한 평화를 다짐하는 자리
그렇게 세상에 대한 고요를 답하는 자리는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내안에 
불성으로 혹은 영성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책은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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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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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흔히 말하는 지방이다.발전과는 대비되고, 


정체와는 동의어가 되어버린 '지방'이라는 단어


하지만 작가 신영복 교수는 이것을 전혀 다르게 뜻 풀이하게 된다.


바로 변화의 원류로서의 지방의 재발견이자, 변방의 재명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답사지를 모두 변방으로 정하고 나아간다.


바로 신영복 교수 자신의 글이 뿌리 내린 곳으로의 여행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다시 만난 글은 


그의 손을 떠나 역사 속 인물들을 다시 해석하고, 살려내어


우리네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시켜준다. 


더불어 그것은 단지 옛 기억의 재생이 아닌 


부활이라고 명할 정도로 치열하고 또한 애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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