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운 100년 - 오연호가 묻고 법륜 스님이 답하다
법륜.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막연히 통일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떠오르는 게 없다.
그저 땅이 넓어진다. 금강산을 갈 수 있다. 자원이 많아진다.
참으로 궁색한 상상력이다.
그렇게 대륙을 노려보던 호랑이는
어느새 대륙의 눈치를 보는 토끼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연호 기자와 법륜스님의 대담 속 통일은 달랐다.
통일이 가지는 원대한 꿈 그리고 희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더불어 그것이 지난 시절
독립군의 비장함과 산업역군의 피땀 어린 노력
그리고 민주투사의 용기로
대변되는 억세고 힘들었던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는
어려운 일은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 통일의 밀알이라고 말한다.
그 첫째가 통일에의 설레임을 다시 가지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는
통일이 과연 될까라는 의문부호 보다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무력감이 상존한다.
그 엄청난 비용을 과연 누가 그리고 어떻게 부담하느냐?
하지만 주판알만을 튕구는 머릿속에는
통일에 대한 막연한 피해의식만 있을 뿐
진정한 통일에의 의미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
하나 된 민족으로의 역사에 대한 복원이 있고, 치유가 있어야지만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동안 중국에의 사대와 일본으로의 종속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굴종되어지고,
굴절되어진 민족의식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것에 대한 진정한 치유는 통일이며,
그것은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통일에의 진정한 이유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래야지만
현재의 외따로 떨어진 남한만의 좁은 섬나라의식에서
벗어나, 세계를 경영할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법륜스님은 지난 역사속 이야기로 부터 우리에게 전해준다.
둘째로 상생과 화합을 이야기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그리고 산업화와 독재를 겪으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진
우리 시대의 갈등 구조속에서 통일로의 발걸음은
어느 한 사람, 한 세력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민족사적 대화합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대역사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앞서의 작은 일부터의 실천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통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 시대에 남은 우리 모두의 마지막 과업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는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지난 과거로부터의 체제경쟁을 위해 있었던
상처 모두를 통일에의 민족사적 씻김굿으로
화해와 용서를 주관함으로서
미움과 증오의 씨앗이 남겨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지금 현재 통일에의 리더는 대한민국이라는 점을 말한다.
원명 교체기와 명청 교체기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우리의 조상은
그에 대한 댓가로써 역사적 아픔을 너무나 값비싸게 치르어 왔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
우리는 다시 한번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흥망이 교차되는 시점에 이르러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다가올 한.중.일 동북아 공동체의 주인공이 되느냐?
중국과 미국의 대척점에 선 백척간두의 광대가 되느냐?
그런 점에서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이라는 경제적 풍요
이미 앞선 국방력을 바탕으로한 자주안보,
국민이 주인이 된 민주화의 가치를 우위로
통일에의 주도권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자세로
이끌어 가야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리되어진 세가지만 보아도
통일은 쉽고도 어려운 길 그리고 헷갈리는 길이다.
그리고 진짜 이 길이 이루어질까 의문스러움이
다시 머릿 속을 찾아온다.
그러나 지난 60년 동안 통일과 관련된 사람은 간첩이 되어지고
빨갱이가 되어진 엄혹한 과거 앞에서 조차 스님은 결연히 말한다.
통일이 밥을 먹여주고, 통일만이 민족이 바로 사는 길이다.
그렇게 통일의병으로의 격문을
사자후와 함께 토해낸 글 “새로운 100년”
출가에의 계기를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으며
1000년을 바라보고 살아라는 화두로 고민했던 스님의 글이기에
삼십년을 겨우 산 후학으로서 그 마음은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통일 그것은 먼 미래가 아닌
바로 당면한 우리의 과제이자
잊어서는 안 될 ‘천년의 꿈’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