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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 불공정사회 - 세상은 왜 공정해질 수 없는가? 법은 어떻게 우리 사회 불공정을 보호하는가?
우리사회정의 엮음 / 독서일가 / 2021년 1월
평점 :
‘법’의 태생적 토대는 폭력! 이 말은 책 목차 중 하나이다. 이 책을 읽는 맥락에서 급소를 누른 느낌이다. 읽기 전에도, 후에도 두고두고 마음에서 울려오는 한마디다.
우리 사회는 정말 ‘법’이 중요시된다. 예전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요즘은 워낙 ‘법’대로 하자는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특히 정치 영역에서 ‘법’을 엄청나게 언급하고, 그에 따라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조국 사태를 떠올려보라. 역대급으로 우리 사회의 시선을 집중시킨 그 사건의 기저에는 ‘법’이 있다. 법무부 장관, 법을 다루는 검찰과 관련한 개혁, 법을 지켰느냐 어겼느냐 등등..
사실 국회의원 선거도 법과 관련된 거다. 의원들이 하는 일이 ‘입법’이니까. 법을 만드는 것, 집행하는 것 등에 관심이 매우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다.
이 책을 읽으면 좋을 독자는 ‘사회에서 너무 법법 거리는데, 이거 괜찮은 거야? 좀 답답한데,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지?’ 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다.
정의,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반명제-안티테제인 ‘부정의’를 살펴보고, 법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성찰한다.
3부 해법에서는 불교, 기독교, 묵자의 이야기와 갈등해결을 위한 절차-소통에 대해 말한다.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이냐에 따라 당연히 평가도 달라질텐데,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12명의 각계 전문가들이 모인 ‘우리 사회정의’ 모임-을 보면 딱 요 정도 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철학자, 교수들이 현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갑을 사회’라는 개념은 생각 못해봤는데,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날 비판적 지식인다운 글이다.
인상적인 언급은 ‘은행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니까 이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를 한 명 더 낳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건 사실 노동운동가 김혜진의 <비정규 사회>에서 인용한 거다. 역시 현장에 울림이 있다. 그럼 지식인은? 그런 걸 모아 메타적인 차원에서 종합하여 비판적 성찰하는 것. 이 맥락에서 책은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좋다!
불교나 기독교 이야기는 그럴 듯 한데 솔직히 생기 없다. 아직 밭에 묻혀있을 뿐 싹 트지는 못한 씨앗은 묵자-교상리에서 발견했다.
중국의 고전해설가 이중천은 ‘춘추전국시대 혼란의 근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묵자였고, 유일하게 대안을 제시한 것은 한비자’라고 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말이다. 왜? 오늘날 현실도 마찬가지니까 그렇다.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진 한비자의 법, 그게 당시 뿐 아니라 오늘에도 선택된 방안 아닌가?
묵자에겐 정확한 분석에 걸맞는 합당한 선택이 있었다. 그의 방법론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나눔과 베품’이다. 에휴, 하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바 아닌가?
그런데 이게 예수의 방법론이기도 하고, 유가의 순자와도 통한다. 고대에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이! 해당하는 대안이다.
이걸 말이 되냐고? 되는 조건이 있다. 바로 마을이다. 마을공동체를 이루면 너무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뜬금없는 마을공동체일까? 오늘날 핵심 문제는 마을-이웃간의 관계성이 해체되고, 개체로 파편화되어 살아간다는 거다. 그런 관계가 없으니 '갑을 관계' 혹은 '상품화된 관계'가 대체하는 거다.
앞에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바뀌면 아이를 1명 더 낳는다고 했다. 아이를 키울 때 마을이 있다면 어떨까? 아이를 함께 돌보고 키우는 관계가 있다면 어떨 것 같냐는 물음이다.
마을을 법과 연결시켜 대비해본다면..
법 없이도 서로 잘 지내는 관계, 법 없으면 불안해하는 관계.
이 차이의 중요 조건으로 마을을 꼽을 수 있다. 전자를 두고 마을이라 말할 수 있고, 후자를 두고 마을이라는 관계성이 메말라버린 채 법으로 유지되는 사회다.
왜 유일한 대안을 ‘법’이라 말하는지 알겠다. 그건 고대부터 그랬다.
그 대안이 실현되고 있음에도 왜 여전히 혼란스러운지도 알겠다.
그건 사랑을 주고 받는 관계, 나누고 베풀 수 있는 마을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공동체, 혹은 마을을 이뤄 살았던 묵자, 예수는 사랑을 말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하나님나라(예수) 혹은 안생생 사회(묵자)를 이 땅에서 선취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현실은 마지막 갈등에서 나오듯 이런 논의가 불가능하고, 원만한 절차를 거쳐 갈등해결하는 정도가 최선 아닐까. 지식인들의 비판을 아주 조금이나마 등떠밀려 수용해서 정치가 조금 달라지는 정도가 고작 아닐까.
우선 묵자처럼 살아보면 되는데, 그럴 리가 없는 우리 사회, 지식인, 이 모임의 현실 아닌가?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말로 어쩌고저쩌고 분석하고 대안을 말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 삶을 실제로 살고, 자신들이 직접 그 기쁨을 누리고, 그걸 대안으로 보여주는 게 아름다운 일이다.
지식인들도, 이 모임에서도 다들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데, 가장 불가능한 것 같은,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사랑의 관계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가까운 해법 아닐까 싶다. 그걸 오히려 저자+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고, 더 온전히 맺어가려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선물인지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