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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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했다. 텍스트로 이렇게까지 비참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 사회 속 살아가고 있는 약자들의 이야기가 여름 날 바깥에 오래 둔 약과의 찐득한 촉감처럼 손가락에 들러 붙는 것 같았다. 이미 완성된 절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향하는 과정을 눈 앞에서 직관하는 느낌. 남루하게 무너져 내리는 집 한 채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분. 그렇다고 너무 슬퍼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읽는 내내 눈알에 잔뜩 힘을 주어야만 했다.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인물들. 소설이 아닌 인간극장과도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의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들. 감상문을 쓸 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호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내가 어떻게 풀어쓸 수 있을까 하여.



더는 세지지 말자 그런 생각. 조금 연해도 된다고, 묽어도 된다고, 빛나지 않아도, 선연하지 않아도, 쨍하지 않아도, 지워질 듯 아슬해도 괜찮다고, 겨우 간신해도.....


그나마 첫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가 중간에 끼어있는 이야기들보다 무난했다고 칭하고 싶다. 권여선 작가의 글은 처음 읽어봤는데 문장을 읽어가다 보면 장면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만큼 장면의 서술이 세세했던 것 같다. (철저히 내 기준)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명덕이란 인물을 볼 때 사실 그의 얼굴을 대입해 보았던 배우가 있다. 비밀의 숲2에서 김사현 검사로 나왔던 김영재 배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예민해 보이면서도 한 편으로 슬픔을 간직한 것 같은 그 얼굴이 명덕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명덕은 그림을 그리는 인물로 아내와의 사별 후 딸과 떨어져 지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듯 했다. 물론 가족애, 서로의 걱정과 염려가 베이스로 깔려는 있었으나 누구 하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듯 했다. 아버지인 명덕의 무뚝뚝한 성격도 거기에 일조를 하는 것 같았고. 그런 딸과 오랜만에 만났지만 과정 역시 순탄치가 않았다. 말은 오역을 거듭하고, 갈등은 스파크가 일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여섯 명인 줄 알았다잖니?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이게 실수인지 고의인지 아빠가 어떻게 알아? 한 번 이렇게 했는데 먹히면 앞으로 또 이렇게 해도 되는 줄 안다고. 난 사람들 그런 게 싫다고."

 "이 사람들 상습적으로 바가지 씌우고 그럴 사람들 아니야. 또 한 번인데 어때? 한 번은 그냥 넘어가."

 "한 번이니까 괜찮다...." 다영이 팔짱을 꼈다. "한 번이니까 괜찮다, 그냥 넘어가자.....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네요? 그렇게 넘거아면 마음이 좋으세요? 한 번은, 한 번은..... 해도 됩니까?"

명덕은 급속도로 굳어가는 다영의 얼굴이 낯설었다.

 "왜 해도 됩니까, 한 번은?"


명덕과 그의 딸 다영의 성격이 가장 명확히 보였던 장면이었다. 식당 측에서는 전화 상으로 여섯 명이라 예약을 받았고, 여섯 명 분의 음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전화를 걸 때 예약자는 분명 다섯 명이라 전달을 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계산을 하고 나올 듯 했다. 다시 안 가면 그만이다. 요즘은 사람들의 의견이 식당 존속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뻔뻔한 가게들은 그런 식으로 망신을 줘야 한다. (써놓고 보니 조금 비겁하네...) 이 상황에서 명덕은 구태여 싸우지 않고 군말 없이 계산을 하고 나왔다. 다영은 치사한 식당의 행태와 덤덤하고 답답한 명덕의 태도에 화를 냈고, 그때 명덕은 화가 났을 때도 감정의 동요 없이 온건히 표현하던 아내를 떠올린다. 명덕은 다영의 사소한 행동이나 표현, 말투에서 아내를 생각한다. 우아하게 화를 내는 방법이 있다. 절대 언성을 높히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법. 글쎄, 나는 화를 내는 나 자신이 익숙하지 않아 그럴 때만 되면 말을 더듬기 일쑤다.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지성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꼭. 명심하고. 내 주변에도 사기 비슷한 걸 당했을 때, 자신이 당한 부당함이나 불편함을 속 시원히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꼭 눌러 참는 이들이 있다. 예전의 나는 명덕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그저 소심한 성격 탓이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복될 법한 불의는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 특히 내 돈이 지출되는 상황에는 당연히. 영화 대사에 보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란 말이 있다. 한 번은, 하고 안일하게 넘어가다 보면 반드시 재발할 것이다. 그런 옹졸한 사기들은 반드시.



이 뒤로 이어지는 에피소드 '손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소설 전체를 다 밑줄을 그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고 해야 할까. '소희'는 언니와 살았다. 원래 엄마와도 함께 살았다. 엄마는 소희의 언니가 모아뒀던 돈과 대출을 받아 종적을 감췄다. 그 뒤로 몇 년 뒤, 소희가 성인이 되고 나서 언니 또한 소희 이름으로 대출을 받고 그간 모아두었던 돈을 갖고 사라졌다. 소희는 스스로의 힘으로 대출금을 갚고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기분이 안 좋았다. 난 비록 제 3자의 입장에서 소희를 바라봤지만, 그 애 앞에 닥친 구질구질한 삶의 악취가 내게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 인물의 삶이 꼭 소설 속 허구에만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속이 답답해지는 거였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소희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돈 걱정은 해도해도 모자라다.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욕심 만큼 상황이 따라주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지금만큼만, 더 가난해지지 않고 사는 것. 다시 소희 이야기로 돌아와서. 소희는 한 시간 반 통근 버스를 타고 직장에 출근해가며 받는 월급으로는 다달이 나가는 이자와 월세를 감당하기에 벅차고, 가장 시급한 돈을 빼고 나면 소희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이십만원도 채 안 된다. 그렇게 일하던 도중 손톱이 뒤집어지는 상처를 입게 된 소희. 병원비로 빠져 나가는 돈에도 벌벌 떤다. 소희의 인생처럼 뒤집어진 손톱. 거뭇하게 멍이 든 손 끝. 냄새나는 진물. 삶. 소희는 그 뒤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언니는 돌아왔을까. 아니면 마음 속에서 끝끝내 자신을 버린 언니를 지워버리고 꿋꿋이 직장을 다니고 있을까. 치료는 했을까. 어딘가에 있을 소희. 어떻게 살고 있을까, 소희는....... 길에서 소희를 만난다면 캐주얼 레스토랑에 데려가 파스타를 사주고 싶다. 소희에게 희망을 얘기해줄 수 있을까. 소희는 내 말을 믿어줄까. 


이 밖에도 기간제 교사, 학교 폭력을 당하는 아이, .... 등 사회 구성원들을 계층으로 구분했을 때 가장 하위에 위치할 지도 모를.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마땅한 사람들이 소설 속에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 불쑥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모든 인간은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존중받아야 하는데 최소한의 존중도 노력해야 쟁취할 수 있는 이들. 그 곳에 어쩌면 내가 포함될 수도 있는 거고. 그들이 나고 내가 그들이 될 수도 있다. 모르겠다. 복잡하다. 구질구질해지는 기분.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 자리에서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말이란 게, 하고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새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수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


가장 마지막 챕터인 '전갱이의 맛'는 앞에서 느꼈던 너저분하고 꺼끌꺼끌한 이야기들을 환기하는 소설이었다. 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말. 말. 내가 뱉는 말, 내가 쓰는 말. 말은 사람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나타낸다고도 한다. 타인에게 하는 말이 곧 내게 하는 말. 그러니 한 번 말을 할 때에는 침묵보다 나은 말들을 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그간 무슨 말을 해오고 있었더라. 곱지 못한 말. 어딘가 휘어진 말. 힐난의 의미를 함축한 검은 말들을 뱉기도 했던 때를 떠올린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혼잣말을 하는 걸까. 대상 없는 말. 내게 하는 말들. 나만의 언어.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했던 말들을 정리하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하나 둘,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나에게 해야 하는 말.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고 기록해두는 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써내려간다. 즐거운 일. 



#추신. 프란츠카프카의 '변신'이란 책을 읽어볼 것.




요즘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때로 어긋나고 싶고 종종 가로지르고 싶고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한 번은 치달리고 싶은데 못 그러니까, 깊은 모름 가파른 모름 두터운 모름까지 못 가고 어설픈 모름 속에서, 잔바람에도 진저리치며 더럽고 질긴 깃털만 떨구는 늙고 병든 새처럼, 다 떨구고 내 앙상한 모름의 뼈가 드러날 때까지 그때까지만 쓸 것인가. 모르겠다.

/ 작가의 말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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