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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카테고리에 이 책을 담아야 할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서간집을 참 좋아한다. 편지란, 받는 이를 정해두고 오로지 그를 향한 마음을 적어내려간 글이 아닌가. 특히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는 한 사람을 사랑하던 사람이 전하려는 마음과 허심탄회한 회고의 작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어 기쁘게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 많았다. 아니, 피에르의 마음이.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이브 생 로랑의 전기 영화인 '이브 생 로랑' 이라는 작품으로 자릴 라스페르 감독이 연출했다. 사실 번쩍번쩍한 명품,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입생로랑의 붉은색 립스틱은 사용해 봤어도 브랜드 설립자에게는 관심조차 없었고, 이브 생 로랑은 내게 그저 백화점 1층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가 21살에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써 디자이너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도, 그가 우울증과 약물 중독에 시달렸다는 것도, 최초로 여성의 정장 바지를 디자인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오랜 시간 삶을 함께 한 피에르 베르제라는 연인이 존재했다는 것도. 영화는 이브 생 로랑을 시작으로 피에르 베르제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운명은 우리를 기다려주었어. 그것이 우리의 가장 값진 노자였음을 기억해줘.
영화를 보다 보면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이브 생 로랑은 예민했으며 약했다. 그의 마음 안에 연약한 나뭇가지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부러졌다. 쇠약해진 심연은 금방 터지고 또 낡아갔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민하게 탐구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타락하고 메말라갔다. 그 누구보다 빛이 났지만 누구보다 초라했다.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한 이브 생 로랑의 이면. 뾰족한 가시와도 같은 그의 고독과 모순까지도 사랑한 피에르 베르제.
봄도 나의 아름다운 여름도
창문으로 도망가버렸네.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겨울의 냉기가 몸을 파고드네.
아무래도 빌을 묻으러 가느라 나도 나의 겨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나 봐. 내 생각이 어떻든 겨울은 그곳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지. 나는 귀먹은 척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러다 어느 날, 그것이 문을 부수어버리는 거야. 너는 나라면 사방을 수리해가며 그조차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운명을 뒤죽박죽 만들기밖에 더 하겠어?
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부터 불씨가 꺼져 저물고야 마는 삶의 최후까지.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을 탐색하고 정의하고,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영화 속 이브는 이름을 알리고 그의 세계를 가꾸어 갈수록 타락하고 수척해진다.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내면의 어둠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남자. 피에르 베르제는 그의 바닥을 보면서도 그를 놓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네 내면의 가장 지독한 욕망은 자기 파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내가 너와 너무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말하듯이 완벽한 평행을 이루고 있었기에 너를 구하는 데 실패한 거야.
누군가를 오래도록 사랑하는 끈질김의 깊이에 대해 헤아릴 수 없다. 또한 이 세상에서 형체가 사라져버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이브 생 로랑. 그는 세상에서 세상으로 사라졌지만, 끊이지 않는 유행처럼 불리운다.
때때로 학교에서 예술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돼.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마 그림을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 나는 언제나 교육적인 문화나 그 비슷한 것은 모두 싫어했으니 말이야.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책을 덮은 후, 나는 가본 적도 없는 파리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패션. 젊음. 이국의 오래된 건물과 알지 못하는 냄새. 이브 생 로랑이 죽은 후 피에르 베르제는 둘이 함께 모았던 수집품을 정리하고 편지를 쓴다. 떠난 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제법 냉철하기도 하며 담담하고 또 애틋하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을 잊었을까. 그 다음 다시 사랑했을까. 허상 같은 사랑. 착각의 결정체를 우린 매번 반복해 믿는다.
네가 내게 보낸 신뢰를 얼마나 자주 체감했는지. 나에게 모든 결정을 맡긴 너는 어떤 계산이나 설명도 요구한 적이 없었지. 그 맹목적인 믿음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나를 뒤흔들어. 그것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증명일 테지. 그리고, 그것이 어찌 되었든, 그 결합은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었어.
피에르 베르제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왜 이브 생 로랑을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다. 많은 이유 중 일부라 할지라도, 아주 조금은. 그에게 찰나란 50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래, 언제나 너였어. 전투에서 모든 힘을 쏟아부은 뒤 이마에 월계수 잎을 두르고 나타나는 것은 바로 너였지. 아, 그 영광의 순간들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승리의 여신이 다가와 네게 세상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더는 너를 저버릴 수 없도록 팔을 쭉 뻗어 너를 흔드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대담함과 오만함의 시기였지. 이른바 젊음의 시절이었어.
"불행의 극치는 무엇인가"라는 프루스트의 질문에 너는 "고독"이라 답했지. 그 고독이 너의 생 마지막 순간까지 무결하게 지조를 지키며 너와 함께할 때 네 영역은 점점 더 협소해지고, 공기는 희박해지며, 밤은 점점 더 일찍 찾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샤넬이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너는 그들에게 권력을 되찾아주었어. 그들의 힘이 남성들에 의해 억눌려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았고, 그들에게 너의 옷을 입힘으로써 어깨에 힘을 얹어주었지. 이것이 네가 한 일이야. 르 스모킹, 사하라 스타일, 투피스 바지 정장, 카방 코트, 트렌치코트가 그 증거야. 그저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만으로, 여성들은 자신들의 여성성을 발전시키는 한편 에로티즘이라는 걸림돌을 치워버렸지.
책을 읽다 이브 생 로랑이 최초로 여성 정장 바지를 디자인했다는 것을 알았다. 르 스모킹. 킨 재킷, 일자로 떨어지는 바지와 주름 장식인 자보가 달린 오건디 소재의 셔츠, 헐렁거리는 넥타이, 실크 새틴의 벨트. 혁명처럼 등장한 의상으로 여성들은 자유를 걸칠 수 있었다. 부유층에서 벗어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생로랑 리브고슈 기성복 라인으로 여성의 턱시도와 바지 정장으로 거리의 여성들에게 달콤한 권력을 선사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바지를 입으면 예의에 어긋난다고들 했단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분야에서 양성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Thank you, Yves.
이후에 '이브 생 로랑 아무르'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싶은데, 도무지 볼 곳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그들의 시대가 궁금해 참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