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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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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이건 오만이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이 땅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건이라는 말에서 다소의 불순함이 풍긴다면 기꺼이 태도라는 말로 바꿀 용의가 있다. 나는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p.9


초판 1992년. 양귀자의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삼십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문장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통찰력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오랜 시간을 질주해 왔다. 책은 도전적이고 강렬하다. 소설 속 인물 강민주 역시 그렇다. 첫 페이지가 주인공 강민주가 어떤 여자인지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강민주는 여성 문제 상담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유선상으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다. 그녀들의 불행의 주 원인은 남자들이었다. 가정폭력, 외도. 나는 이런 환경에 처한 여성들을 본 적 있다. 그들은 나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가정을 놓지 못하고 죄 많은 남자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에야 이혼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니 이혼이 큰 일은 아니라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이 평생을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오죽하면 안전이별이란 말이 생겼을까. 아! 이 역시 남자들이 원인이다. 흔한 일반화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사건 가해자는 남자들이 아니던가. 사회와 그들의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싶지 않다.  선택은 그들이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 질책을 하고 싶은 것이다. 몇 달 전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모르는 남자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난 후 나는 밤에 혼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기가 무서워졌다. 최근에 밤 열 시에 쓰레기를 버리러 간 적이 있다. 그날따라 그 주변에 담배를 피우러 나온 남자들이 대 여섯명이나 있었다. 괜히 화가 난 척, 팔을 휘적휘적 휘저으며 공동현관문까지 걸어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상을 두려워해야 하다니.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세상은 더욱 포악해지고 끔찍해졌다. 혐오의 표출은 당당해졌으며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강민주 같은 여자가 나타나 남자 배우를 납치한다면 어떻게 될까. 줄거리만 들어도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졌고, 틈이 날 때마다 책장을 넘겼다.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p. 46


모든 남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를 거쳐갔던 남자들 역시 거기서 거기였다. 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니가 능력이 없고 별로라서 그런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으나 나는 정말 다양한 남자들을 만났었다. 스무살 때 만난 남자는 비교적 순진했다. 뭐,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중간에 우연히 알게 된 32살의 남자가 나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내 나이 23살 때였다. 그리고 만난 남자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해 내게 거짓말을 하고 그녀와 동침을 한 남자였다. 아, 그 새끼는 나와 말싸움을 하다 내 자취방 벽을 주먹으로 친 전적도 있다. 벽이 패인 것은 내가 보상했다. 휴대폰을 집어던진다던가, 소리를 지른다던가, 나의 사생활을 통제하려 한다던가. 온갖 최악의 집합체였다. 그리고 나서도 나는 남자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어딘가에는 멀쩡하게 나를 사랑해 줄 남자가 있겠지. 그 뒤로는 흐지부지, 그저 그런 놈들을 만났고 나는 이후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줄 남자도 없을 뿐더러, 내가 나를 사랑해야만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종족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다. 그 뒤로 나는 몹시 편안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 중이다. 


주인공 강민주는 환상처럼 완벽한 인물 백승하라는 남자배우를 납치하기로 한다. 여자들을 교란한 죄.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한 죄. 자신이 택한 남자가 나빴던 것은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기며 여자들을 운명주의에 빠뜨린 죄명을 붙여서. 그리고 납치를 돕는 인물 중 그녀의 수족과도 같은 '남기'가 있다. 아, 그리고 찰거머리같은 남자 김인수가 등장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 강민주가 어떤 처세와 태도로 사건을 대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성에 대한 변화 역시 예측할 수 없었다. 


강민주가 백승하를 길들이는 부분 역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어쩌면 가정폭력범들의 가스라이팅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폭력. 즉 채찍을 사용하고, 그 뒤에 달콤한 당근을 건넨다. 


그러나 나는 박 여자와는 생각이 다르다. 남자가, 이미 검은 발톱을 드러낸 남자가 '뜻밖에' 회개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절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가증스럽게도 다시 여자 마음을 얻어 기대보려는 것이 남자들이란 족속이다. 검은 발톱은 부러진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발톱은 다시 자란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여자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른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다. -p.109


책을 읽으며 밑줄을 친 부분이 굉장히 많다.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사실 '남자'와 '여자'로 표현을 했으나 여기서 표현되는 남자들은 이 세상의 존재하는 수많은 강자들, 기득권층이라 여겨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컨대 여자는 '동물'이 될 수도 있고 남자는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사이 백승하는 울부짖으며 현실을 부정하고 반항을 한다. 그럴 때마다 강민주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며 백승하가 이 상황을 수긍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붙잡아 놓고 설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압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그가 이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도록 한다. 희망이 없다는 것. 그 끔찍한 절망. 강민주는 백승하에게 그것을 선사하고, 또 그의 가슴에 희망을 심을 것이다. 


* 소설을 읽으며 이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면 백승하는 어떤 배우가 해야 할까 생각을 해 보았다. 젊은 박해일 말고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남기의 이런 양면성에 대해 전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기처럼 우직한 인간에게는 순수와 용맹은 한 이름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순수하기에 용감한 것이고 용감할 수 있기에 순수한 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르거나, 추하고 아름답다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 그 단순 명료함, 이것이 우직한 삶이 지닌 미덕이다. -p.175


강민주의 곁을 지키는 충직한 인물 황남기에 대해서도 잊지 않아야 했다. 그는 강민주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한다. 강민주를 우러러보는 남자. 그는 그녀의 어머니 덕분에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그녀의 딸인 강민주의 말이라면 복종을 하는 것이다. 궂은 일은 남기가 한다. 백승하를 납치하는 것. 동태를 살피는 것. 요리, 청소까지. 강민주 역시 세상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남기를 대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이성적 연애 감정이 기반되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황남기는 강민주를 사랑하나 갖고자 하는 욕심이 없다. 강민주 역시 황남기를 자신의 특별한 수족으로 여긴다. 강민주와 백승하는 대화를 통해 차츰 거리를 좁힌다. 불신과 의심의 대상인 백승하가 알고 보니 꽤 괜찮은 인물이었기에 강민주 역시 마음을 연다. 아니, 백승하를 신경쓰기 시작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될지 더욱 궁금해졌는데, 강민주가 결국 백승하를 사랑해 버리는 결말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강민주의 상황을 어떻던가. 그녀는 더이상 강해질 길이 없다.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그런 그녀가 사랑을 한다면 단연 약해지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내 생각은 그랬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백승하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다는 것. 백승하는 유부남이다. 그런데 강민주가 백승하를 위해 황남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들을 데리러(납치) 가는 대목에서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백승하는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 남자였다. 물론 그는 자신이 남자로서, 남자라서 누려온 당연한 특권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많은 남자들이 그렇다. 오히려 여자들을 위해 도입된 제도가 역차별이라고 들고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그는 강민주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직업에 대한 열정이 투철한 배우였다. 게다가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외모 역시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이런 글을 적는 나 역시 백승하에게 설득이 된 것은 아닐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나를 짜증나게 했던 것은 김인수라는 인물이었다. 상담소에서 일하던 강민주에게 관심을 갖고 끊임없는 구애를 하는 캐릭터다. 상대방의 의견보다 자신의 감정과 욕심이 우선인 인물로써 본의 아니게 강민주를 괴롭히고, 강민주를 불안에 떨게 한다. 이런 놈들이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오직 밀어내기와 뒤집어씌우기에만 골몰해온 남성 무사들의 활극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며 끊임없이 생명의 존엄성을 생활 속에 구체화해온 여성, 지배보다는 평화를 욕망하고, 억압받아온 역사로 억압받는 자의 마음을 거울 들여다보듯 잘 느낄 수 있게 된 여성, 이런 여성들이 한 집단의 수좌가 된다면 세상은 적어도 지금보다 열 배 더 아름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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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의 제도가 오류투성이였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세상을 보면 자명하게 드러난다. 정치는 오로지 권력 창출의 작업에 불과하고, 교육은 노예계급에서 기어오르려는 자들의 목숨을 건 혈투로 변모했다. 경제는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을 거듭하며 오직 자본만이 자본을 재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도덕은 땅에 떨어져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p.266


나는 이 부분이 감명 깊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남성 지배의 역사. 대부분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닌 이들은 남성이다. 이 역사가 어떻게 끊어져야 할지 알 수 없으나, 강민주는 이 사건으로 인해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강인한 여성.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여성 강민주는 여자들의 유니콘 같은 백승하라는 남자도 결국은 여느 남자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여성들이 깨어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이 오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여자들이 얻어야 할 권리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여자들은 얼마나 많은 피를 보고 땀을 흘려야 할까. 


"난 여자들이 연약함을 내세워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을 혐오해요. 남자들이 연약한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런 작태를 부추기는 꼴이지요. 여자라는 존재는 약하다고 믿고 싶은 게 남자들 희망이거든요. 그래야 여자들 위에 군림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집단 최면인지도 몰라요. 여자는 연약하다, 여자라는 존재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가냘픈 존재다, 라고 자꾸 떠들어주니까 여자들이 점점 약해지는 거예요. 남자들은 강한 여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어요. 그들도 그걸 알아요. 여자라는 종족이 사실은 남자보다 우월한데 거기다 힘까지 강해지면 절대로 휘어잡을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약한 여자가 아름답다고 외치지요. 그 말은 곧, 여자들이여, 제발 힘을 버려달라, 라는 주문에 다른 표현이라고요."


내가 5년 전 이 사실을 자각했다. 양귀자 작가는 훨씬 오래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가의 통찰력이 감탄스럽다. 여자들은 똑똑하고 현명하다. 그러나 세뇌 당해 왔다. 아름다운 여성이 남자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아름다움이란 외면에 한하며 하얗고 날씬해야만 아름다운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온 사회와 세상이 여자들에게 말했다. 다이어트에 목을 매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매일 몸무게를 재고 밥을 굶었다. 화장품을 한 보따리를 사서는, 하늘하늘하고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주로 입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화장도 하지 않고, 활동성이 뛰어난 옷을 주로 찾아 입는다. 바지와 반팔. 살이 찌는 것이 두렵지 않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맛있는 것을 먹는 낙으로 퇴근 후를 즐긴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평화롭다. 주눅들지 않는다. 사회가 규정지은 틀에서 벗어날까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나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여자들은 강해져야 한다. 반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나에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구석에서 탄환이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어리석은 남자들아.


작가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능력에 찬사를, 그리고 또 한 번 강해지기를 소망하며. 금지를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다짐하며.












내 일기는 하루의 궤적을 남기는 데 필요할 뿐이다. 처음엔 내 시간들이 어디로 공중분해 되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무미건조한 나열이지만 나중에 기억이 사라졌을 때 읽어보면 그 시간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른다. 그래, 그 찻집에서 흰 블라우스에 커피를 엎질렀었지. 전혀 하지 않던 실수를 해서 버린 옷보다 그 실수 자체에 얼마나 절망했던가. - P28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부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 P72

생각해 보라.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희생과 인내를 감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 두꺼운 역사책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약자가 택할 길은 희생이나 인내밖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 것이다. - P73

미지를 향한 끝없는 발돋움, 삶이란 그 한없는 떨림의 공명판이 아니던가. - P83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단언하건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사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지도하는 인사는 없다. 대단찮은 학식이나, 상업주의 언론에 이름을 팔은 속된 명성으로 자신을 지도층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혐오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 P86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옆자리 여자의 가슴을 툭 치는 중년 사내의 희고 살찐 손, 번들거리는 얼굴. 나는 거의 구역질의 지경에 이르고 만다. 나는 언제나 진화되지 않은 미개인 사내들 때문에 욕지기를 느낀다. 그들만 아니면 세상은 얼마나 밝고 부드러우며, 또한 멋진가. - P135

나는 연약한 이 땅의 여자들에게 절망한다. 내가 벌이고 있는 남자들과의 전쟁에서 진정한 동성의 협력자를 얻는 일은 정녕 불가능한가. 어차피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홀로 치르는 전쟁, 끝까지 혼자 가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 P256

"내 앞날을 쥐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내 말에 백승하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오. 당신도 어차피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 것을. 당신의 비범함을 보고 있으면 아슬아슬한 기분이라오. 세상은 비범한 자에게 관대하지 못해요." - P331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직정 옳지 않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작가의 말 중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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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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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구의 증명이 내 책장에 머문 지 약 삼 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도무지 첫 장이 넘어가질 않아 펼쳤다 접기를 몇 차례. 이 문장이 자꾸만 눈에 띄어 결국 무심결 책을 폈다.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로 나는 불호였다. 날것의 문장. 무언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표현되는 집착적이고 쓸쓸한 이야기. 방바닥에 콜라를 쏟고 한참이 지나서야 닦아낼 때처럼 끈적끈적한 소설이었다.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담과 구. 불행하고 고독한 아이들의 종말. 


식인이라는 소재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그려내서 그런지 미미하게 울렁거리고 역겨운 듯했는데, 담이 구를 왜 먹었는지에 대해 이해해보면 무척이나 괴로워진다. 사랑이 喰으로 이어질 수 있다니. 



지난날, 애인과 같이 있을 때면 그의 살을 손가락으로 뚝뚝 뜯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다가 혼자 좋아 웃곤 했다. 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가능케 하는 상상.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종종 돌아봤다. 


그리고 또 많은 날 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분명 살아 있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2015년 3월 일인용 의자에 앉은 최진영 작가는 이렇게 썼다. 나도 종종 애인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상상을 한 적 있다. 손가락을 야금야금, 말랑한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 상상. 단지 애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먹어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정표현의 일부를 과장되어 생각한 것뿐이다. 하지만 소설 속 담은 구를 먹어치웠다. 여기저기 찢기고 멍이 든 구의 시체를 하나하나 뜯어 먹는 여자애를 상상하니 처절하고 딱했다. 책의 가장 처음은 구가 죽고 담의 마음으로 시작한다. 나는 처음에 아포칼립스 세계관인 줄 알았다. 가장 아끼던 이를 먹으면서까지 살아 남으려 애쓰는 강렬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앉은 자리에서 두 시간이 조금 넘은 시간만에 책을 완전히 읽어버렸는데, 읽고 나니 어딘가 허무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가난하고 구질구질하며 처절한 사랑 이야기는 내게는 조금 별로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 P21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 P25

기다릴까. 기다리다 만나면 뭐라 말할까. 잘 지냈냐고 물어볼까. 너 때문에 나는 만사가 시시해졌는데 너는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볼까. - P51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 P81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 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영영 이렇게 살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 P90

구의 기쁨과 환희, 우울과 절망에도 내가 있어야 했다. 그 욕심은 오직 구만을 향했다. 담아. 우리를 기억해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 P103

누나 나이쯤 되면 계산적으로 이성을 만나게 된다고. 만나자마자 서로의 처지와 조건을 재고 따져서 견적내기 바쁘다고. 그런 만남을 반복하다보면 스스로 상품이 된 것 같고 상대 역시 상품처럼 대하게 된다고. 과정을 함께하며 서로의 됨됨이를 알아가는 걸 번거로워하고, 결과로 남은 것만 보려 한다고. 그런데 나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진짜 살아 있는 마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생생하게 숨쉬며 시시각각 변하는 생물을 대하는 것 같다고, 말라붙지 않은 심장이 느껴져서 좋다고 했다. - P119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 P149

죽어가며 간신히 움직인 그 의지를, 뼈와 근육을, 구의 마음을, 어떤 상상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나의 뇌를 꺼내 내팽개치고 싶었다.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 P165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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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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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카테고리에 이 책을 담아야 할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서간집을 참 좋아한다. 편지란, 받는 이를 정해두고 오로지 그를 향한 마음을 적어내려간 글이 아닌가. 특히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는 한 사람을 사랑하던 사람이 전하려는 마음과 허심탄회한 회고의 작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어 기쁘게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 많았다. 아니, 피에르의 마음이.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이브 생 로랑의 전기 영화인 '이브 생 로랑' 이라는 작품으로 자릴 라스페르 감독이 연출했다. 사실 번쩍번쩍한 명품,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입생로랑의 붉은색 립스틱은 사용해 봤어도 브랜드 설립자에게는 관심조차 없었고, 이브 생 로랑은 내게 그저 백화점 1층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가 21살에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써 디자이너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도, 그가 우울증과 약물 중독에 시달렸다는 것도, 최초로 여성의 정장 바지를 디자인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오랜 시간 삶을 함께 한 피에르 베르제라는 연인이 존재했다는 것도. 영화는 이브 생 로랑을 시작으로 피에르 베르제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운명은 우리를 기다려주었어. 그것이 우리의 가장 값진 노자였음을 기억해줘.




영화를 보다 보면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이브 생 로랑은 예민했으며 약했다. 그의 마음 안에 연약한 나뭇가지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부러졌다. 쇠약해진 심연은 금방 터지고 또 낡아갔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민하게 탐구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타락하고 메말라갔다. 그 누구보다 빛이 났지만 누구보다 초라했다.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한 이브 생 로랑의 이면. 뾰족한 가시와도 같은 그의 고독과 모순까지도 사랑한 피에르 베르제. 



봄도 나의 아름다운 여름도

창문으로 도망가버렸네.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겨울의 냉기가 몸을 파고드네.


아무래도 빌을 묻으러 가느라 나도 나의 겨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나 봐. 내 생각이 어떻든 겨울은 그곳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지. 나는 귀먹은 척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러다 어느 날, 그것이 문을 부수어버리는 거야. 너는 나라면 사방을 수리해가며 그조차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운명을 뒤죽박죽 만들기밖에 더 하겠어?




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부터 불씨가 꺼져 저물고야 마는 삶의 최후까지.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을 탐색하고 정의하고,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영화 속 이브는 이름을 알리고 그의 세계를 가꾸어 갈수록 타락하고 수척해진다.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내면의 어둠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남자. 피에르 베르제는 그의 바닥을 보면서도 그를 놓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네 내면의 가장 지독한 욕망은 자기 파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내가 너와 너무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말하듯이 완벽한 평행을 이루고 있었기에 너를 구하는 데 실패한 거야. 




누군가를 오래도록 사랑하는 끈질김의 깊이에 대해 헤아릴 수 없다. 또한 이 세상에서 형체가 사라져버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이브 생 로랑. 그는 세상에서 세상으로 사라졌지만, 끊이지 않는 유행처럼 불리운다.




때때로 학교에서 예술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돼.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마 그림을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 나는 언제나 교육적인 문화나 그 비슷한 것은 모두 싫어했으니 말이야.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책을 덮은 후, 나는 가본 적도 없는 파리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패션. 젊음. 이국의 오래된 건물과 알지 못하는 냄새. 이브 생 로랑이 죽은 후 피에르 베르제는 둘이 함께 모았던 수집품을 정리하고 편지를 쓴다. 떠난 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제법 냉철하기도 하며 담담하고 또 애틋하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을 잊었을까. 그 다음 다시 사랑했을까. 허상 같은 사랑. 착각의 결정체를 우린 매번 반복해 믿는다. 




네가 내게 보낸 신뢰를 얼마나 자주 체감했는지. 나에게 모든 결정을 맡긴 너는 어떤 계산이나 설명도 요구한 적이 없었지. 그 맹목적인 믿음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나를 뒤흔들어. 그것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증명일 테지. 그리고, 그것이 어찌 되었든, 그 결합은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었어. 



피에르 베르제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왜 이브 생 로랑을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다. 많은 이유 중 일부라 할지라도, 아주 조금은. 그에게 찰나란 50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래, 언제나 너였어. 전투에서 모든 힘을 쏟아부은 뒤 이마에 월계수 잎을 두르고 나타나는 것은 바로 너였지. 아, 그 영광의 순간들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승리의 여신이 다가와 네게 세상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더는 너를 저버릴 수 없도록 팔을 쭉 뻗어 너를 흔드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대담함과 오만함의 시기였지. 이른바 젊음의 시절이었어.



"불행의 극치는 무엇인가"라는 프루스트의 질문에 너는 "고독"이라 답했지. 그 고독이 너의 생 마지막 순간까지 무결하게 지조를 지키며 너와 함께할 때 네 영역은 점점 더 협소해지고, 공기는 희박해지며, 밤은 점점 더 일찍 찾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샤넬이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너는 그들에게 권력을 되찾아주었어. 그들의 힘이 남성들에 의해 억눌려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았고, 그들에게 너의 옷을 입힘으로써 어깨에 힘을 얹어주었지. 이것이 네가 한 일이야. 르 스모킹, 사하라 스타일, 투피스 바지 정장, 카방 코트, 트렌치코트가 그 증거야. 그저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만으로, 여성들은 자신들의 여성성을 발전시키는 한편 에로티즘이라는 걸림돌을 치워버렸지.




책을 읽다 이브 생 로랑이 최초로 여성 정장 바지를 디자인했다는 것을 알았다. 르 스모킹. 킨 재킷, 일자로 떨어지는 바지와 주름 장식인 자보가 달린 오건디 소재의 셔츠, 헐렁거리는 넥타이, 실크 새틴의 벨트. 혁명처럼 등장한 의상으로 여성들은 자유를 걸칠 수 있었다. 부유층에서 벗어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생로랑 리브고슈 기성복 라인으로 여성의 턱시도와 바지 정장으로 거리의 여성들에게 달콤한 권력을 선사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바지를 입으면 예의에 어긋난다고들 했단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분야에서 양성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Thank you, Yves.



이후에 '이브 생 로랑 아무르'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싶은데, 도무지 볼 곳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그들의 시대가 궁금해 참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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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겨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1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나송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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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나 어떤 글을 읽고 그것을 떠올릴 때 이미지나 색감을 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은 표지의 영향 때문인지 향기로 기억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비 내리는 밤거리 특유의 축축하고 습한 물 비린내라던지 오래된 재즈 클럽에서 날 것 같은 나무나 담배 냄새. 그도 그럴 것이 주배경이 거의 그렇다. 나의 책장에 꽂혀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일부는 변신, 구토, 1984 이 세 권인데 아직 펼쳐보지 않았다. 새해 들어 처음 작성하는 독후감임에도 심히 시시할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상황이나 배경의 서술이 섬세해서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의 풍경을 그려보노라면 언젠가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기도 했다. 소설의 장르는 범죄 느와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작품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제법 어둡고 습한 게 꼭 영국의 하늘 같았다. 


소설은 제 삼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이름 모를 화자가 주인공인 비랄보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신이 보고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식이다. 비랄보는 바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사람이다. 손님으로 왔던 말콤과 그의 연인 루크레시아와 사랑에 빠진다. 개인적으로 금지된 사랑 이야기에 대해 흥미롭게 바라보는 편인데, 이 소설에서 비랄보와 루크레시아의 사랑은 어딘가 메말라 있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었는지도 의문이다. 단지 외로워서, 고독하여 필요로 한 것은 아닐까 싶다가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은닉, 도피의 중간중간 그들이 인연을 끊지 못하는 걸 보면 사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사랑에 대한 눈물이 없다. 죄책감도 없다. 그래서 나 또한 화자의 시선에서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음악가는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마치 내 생각을 반박하듯 비랄보가 말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어깨 위에 과거와 단어들과 그림들을 쌓는 것에 지나지 않아. 음악가는 늘 공허함 속에 살지. 그의 음악은 연주가 끝나는 순간에 존재하기를 그만두거든. 음악은 순수한 현재야."



작품의 초반, 크리스티안 비랄보가 화자에게 한 말이다. 어쩌면 그는 진정한 음악가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을까. 연주가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그만둔. 공허함 속에 사는. 그가 종국에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 없다. 루크레시아와는 다시 만났을까. 그들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하룻밤을. 건조하고도 다정하게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다 밤을 보내지 않을까.



그는 음악에 자신을 맡겼다. 등대가 비추는 공간밖에 모르고, 멀어지고 숨으려는 계산과 본능으로만 암흑과 거리의 움직이는 물체에 몸을 맡긴 채 말이다. 길 모르는 지방 도로를 늦은 저녁 시간에 혼자서 운전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음악은 항상 누군가를 향한, 루크레시아를 향한,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일 뿐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지 금지되었기에 매혹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그러나 비랄보에게 루크레시아를 향한 사랑은 불완전하고 불안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음악이 그를 완전하게 했지. 잿빛 띤 밤거리의 한 가운데, 달리는 비랄보와 골목에 몸을 숨긴 루크레시아의 코트 자락 같은 것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여자와 남자는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 안에서 현재를 살기 위해 내달리고 새벽이면 서로를 생각했을 것이다. 




웃음은 항상 그들을 구해 주었다.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학적인 우아함, 그것은 각자가 쓰고서 서로를 이해해 주는 가면이었다. 절망에 대한 가면이자 두 배의 두려움에 대한 가면이었다. 그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 한없이 혼자이고 버림 받고 방황했다.



루크레시아가 같이 있기만 하다면 비랄보도 그런 곳을 아주 좋아했다. 난생처음으로 자기 앞에 꿈꿔 보지도 못한 많은 시간과 금전을 얻은 사람처럼 차분한 탐욕으로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사랑했다.



냉혹하게도 비랄보는 그중 그 어느 것도 그를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에 대한 간절한 탐색전이 외로움의 냉혹한 징표를 없애지는 못했다. 없애기는커녕 그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서글픈 진리인 양. 






헌데 나는 이 소설 속 사랑을 말하는 문장들이 좋았다. 열정처럼 뜨겁지 않은 문장들. 오히려 시렸다. 리스본은 그들에게 꿈의 도시이며 되돌아갈 수 없을 곳이다. 리스본의 겨울. 스페인. 






*폴 세잔 - 생빅투아르 산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거짓말하는 것보다 더 그들을 보호해 준다고 생각했다. - P43

이제 산티아고 비랄보에게 시간은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속력, 그를 서투르게 만들어 버릴 속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함께하기엔 너무 빠른 음악가들과 연주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둔함이 다른 곳들에도 전염되었다.

- P94

한 사람의 얼굴은 항상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예언이다. 루크레시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낯설면서도 더욱 아름다웠다. 3년 전에는 징후만 보이던 충만함의 표시들이 이제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며, 이렇게 충만함이 실현되자 비랄보에 대한 사랑이 그 여인 위로 퍼졌기 때문이다. - P98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 줘.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 P105

그는 입맞춤을 하며 서로의 슬픔, 그의 고독한 욕망, 어둠이 주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어둠 속에서 아직은 자신의 손이 느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약간은 적의를 품은 다른 육신의 존재를 가까이 느꼈고 사랑을 거부하는 조심성도 느껴졌다. - P151

이젠 그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항상 가치 있고 열정적이고 공격적이며 냉정한 방법으로 죽고 싶었다. - P158

홍수로 범람한 강물이 다시 원래 강줄기를 찾아가듯, 그 노래들이 혼란스럽게 멜로디를 뒤엎었다가 다시 원래 멜로디를 찾아가는 침착한 격정을 나는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 P161

"지난 시절에 대해 네가 뭘 알아, 애송이. 네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야. 다른 사람들은 적당한 때에 죽어서 30년을 지옥이나 하느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내는 곳에서 연주하며 지내지. 날 봐, 난 그림자일 뿐이고 추방자일 뿐이야. 내 조국에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그 시절에서 추방당했지. 남겨진 우리들은 죽지 않은 척 지저귀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우린 가짜야." - P172

권총을 쥔 손처럼 굳은 모습으로 말없이 지속되는 원한을, 패배의 품위와 기억에서 잊혀 허무하고 거의 다 흩어져 버린 분노를 내보이고 있었다. - P208

그것은 분명 말과 몸짓, 조심스러운 욕망으로 가득 찬 계략 같은 것이었다. 서로 적합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들 자신 안에 있지 않은 어느 것도 원하거나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머물러 본 적 없고, 보이지 않는 서로의 왕국이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왕국의 경계선은 신체를 구성하는 피부나 냄새만큼이나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볼 때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은 서로의 것이 되었다. - P230

그 순간 그는 화가가 그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자신이 피아노를 쳐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감사와 겸손으로,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며, 지적이면서도 순수하게, 처음 애무하면서 적당한 말을 찾을 때 느끼는 애정과 경외감 속에서 말이다. 긴 시간에 걸쳐 용해되듯 색깔들이 녹아내려 있었다. - P235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밤, 도주, 죽음에 대한 공포, 루크레시아를 찾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가끔 사랑이 그랬고 거의 항상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그 그림은 이상하고도 고집스러운 정의의 윤리적 가능성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우연이 형태를 갖추고 세상이 다시 살 만해지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비밀스러운 질서의 가능성이었다. 성스럽게 꽉 닫혀 있으면서도 일상적이고 주위에 녹아 있는 그 무엇이었다.

어쩌면 아침 녘의 정적인 빛줄기 아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지속, 기념, 회귀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영원히 그의 것일 터였다. - P254

비랄보가 말했다.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에, 두 뺨에, 머리카락이 시작하는 부분에 입을 맞추었다. 음악보다 더 원하는 어둠 속에서, 그리고 망각보다 더 달콤한 어둠 속에서. - P256

그날 밤 빌리 스완은 그들, 증인이나 공범들을 위해 연주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랄보는 말해 주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어둠과 침묵을 위해, 빛의 장막 저편에서 거의 부동자세로 흔들리던 윤곽 없는 얼굴들을 위해, 눈과 귀, 그리고 리듬을 타던 이름 없는 심장들을 위해, 잔잔한 심연에 줄지은 얼굴들을 위해 연주한 것이었다고 했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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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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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체스의 모든 것 p.22




알라딘에서 준 형광펜은 유통기한이 짧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밑줄을 그은 문장인데 보라색 형광펜은 문장 하나가 다 끝나기도 전에 공백을 남발하며 하얀 책장에 오점으로 자리해 버렸다. 너저분한 밑줄에 울컥 짜증이 나 당장에 형광펜을 버려버렸다. 문장을 적기 위해 페이지를 펼쳐둔 지금도 깨나 거슬린다. 참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제 역할 하나 해내지 못하는 형관펜 하나에도 삐죽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데, 사랑을 하면 꽤 많은 것을 참을 수 있다. 오히려 나의 거슬림이 정당한 것인지 스스로를 검열하느라 짧은 시간을 쓰기도 한다. 쉽게 작아지고 쉽게 자라나며 쉽게 증발하고야 마는 것.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결과들을 내 앞에 들이민다. 




나는 아직도 국화에 관해 지속된 생각을 해, 라고 잔뜩 취해 더 꼬부라진 영어로 말했다. 걔가 자기는 뭐가 되든 앞으로 이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던 걸 기억해. 그 말은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진로 이야기를 하면서 선배는 사실 자기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나는 NGO 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국화는 난데없이 자기는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심장이 되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 - p.26




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노아 선배는 부끄러움을 회피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철에 맞는 시건방짐으로 결핍된 자신의 빈곳을 감추려 했던 사람. 국화와 노아 선배는 체스를 두며 따가운 신경전을 벌이곤 했는데, 노아 선배는 매번 국화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반박의 실패. 그 사이 노아 선배는 국화를 동경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인정 속도가 느리며 부정기를 겪곤 하니까. 하지만 노아 선배와 국화의 사이는 그 상태로 종료 되었다. 노아 선배는 피비 케이츠를 닮은 여자와 결혼을 했고 무채색에서 벗어났다. 비록 얼마 안 가 이혼을 하고 말았지만. 




나는 사랑에서 대상에 대한 정확한 독해란, 정보의 축적 따위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완수였다. -p.27




자라고 나서도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 반성하고 후회하고 사과하고 그리워하면서. 결국은 지나가 버린 시절을 꾸역꾸역 기억 너머로 밀어넣으면서. 




나는 내가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의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 외로운 사람들. 고독하고 결핍된 사람들. 청춘들. 성장을 멈춘 나무들. 






은수가 어떻긴 뭐가 어떤가. 그냥 잘생기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뭔가 일이 안 풀리고 불안정하고 종종 죽고 싶고 그런데도 일은 나와야 하고 꿈은 멀고 다 귀찮고 때론 내 몸이라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버리고 싶고 길바닥에 버리고 줄줄 새어나오게 심장이랑 머리랑 손톱이랑 발목이라 벗어두고 홀가분해지고 싶지. 그렇게 젊은 게 좋으면 니들이나 가져라, 하면서 젊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버리고 눕고 싶지. 아무데나 누워서 구름이나 세고 싶지.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p.47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이 부분에만 표시가 되어 있다. 공감의 표시일 터다. 누군가 너 요즘 어떻게 사니, 하고 물으면 내가 숨도 안 쉬고 이렇게 대답할 것만 같아서. 아무데나 누워서 구름이나 세고 싶지. 회사 따위는 가지 않고 자본주의라는 세상의 굴레를 애서 무시하면서 형편없는 통장 잔고는 모르는 척, 차가운 현실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걸 거부하면서 그저 속 편하게 지나가는 구름이나 관찰하며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고. 낭비하고 싶다고. 


카페 아르바이트생인 은수를 좋아하던 사장은 왜 모자를 벗은 뒤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을까. 모자로 감추고 있던 자신만의 약점이 드러난 탓일까. 스스로 어떤 초라함을 느꼈기에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고 카페로부터 발길을 끊은 것일까. 소설을 읽으며 몇 년 전 (회식으로) 자주 갔던 호프집의 사장님이 떠올랐다. 그분도 모자를 쓰고 다녔다. 체크 남방에 헐렁한 청바지. 웃을 때 드러나던 덧니가 기억난다. 그 사장님은 언제나 호탕했고 동물을 사랑했으며 그곳의 안주도 맛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보통 모자를 멋으로 쓰지 않는다. 머리를 감지 않았거나, 온전한 얼굴을 감추고 싶을 때 모자를 사용한다. 아마 사장도 그러했을 것이다. 감추고 싶은 무언가가 한순간에 들추어졌을 때, 그녀는 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탈하고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곱씹어보면 인물들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주변의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의 감정을 이렇게나마 공감하고 예상한다는 게 썩 즐거운 일은 아닌 것 같다만.





우리의 경우는 일단 사가면 웬만해서는 돌이키기가 힘이 드는데. 아주 힘들지, 얼마나 들춰봤든, 얼마만큼의 애정과 소유욕이 남아 있든 되돌릴 수가 없어. 불가능해. -오직 한 사람의 차지 p.77


나는 이 이야기의 화자인 남자가 참으로 한심했다. 뭐,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물론 큰 기대와 꿈,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데다 자신만의 철저한 계획도 있었을 테지만. 결국 출판사를 말아 먹은 남자. 그나마 처가에 돈을 빌려 사업을 했으니 망정이지, 하마 터면 큰 빚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어버릴 뻔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럴거면 앞으로 무얼 해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장인 식당에서 일손이나 도울 것이지. 장인이 사장님들 계모임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달라고 했을 때, 괜한 자존심 부리지 말고 친절하게 거절을 할 것이지. 그 와중에 아내인 '기'는 교수로서 지원한 대학교에서 연락을 받지 못하는데. 남자가 제 책을 사 가서는 환불해달라는 낸내라는 여자를 만나 이따금 낸내의 생각을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떠올렸다. 


어쩌면 원래 산다는 것이 그런 걸까. 전혀 상관없을 듯한 천체의 무엇인가에까지 계속 빚을 지고 가늠도 못할 잘못들도 하면서 사는 것일까. -p.91


결국 장인의 식당 냉동고에 보관하던 책들을 싸그리 처리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뭐야 저 차들을 좀 봐, 저렇게 다들 안개등을 켜고 가니까 꼭 별빛 같잖아. 이런 속도로 가다가는 집까지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이 곡예운전이 대체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데 기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동면을 지속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은 다 잊은 봄날의 곰처럼, 아니면 우리가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처럼. -p.93


나는 그가 남편으로서, 사위로서,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하고 살길 바란다. 아, 이렇게 쓰면 너무 냉담하고 현실적인가? 하지만 유교국가의 여성으로서 장인이 건넨 담배를 저도 모르게 손으로 쳐 떨어뜨릴 때부터 나는 그의 한심함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니, 그런 건 염세일까, 완벽한 처세일까. -모리와 무라 p.196


호텔리어로 오랜 시간 일을 해온 단정한 숙부. 숙부는 과거의 일로 악몽을 꾸고 환상을 본다. 죄책감은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맴돈다. 다정아 그게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언 발에는 얼음이 박힌다. 그게 봄여름 잠깐 숨었다가 겨울 되면 다시 나타나. 안 사라져. 꼭 나타나는 거야. 숙부는 컴컴한 어둠 속 검은 개 같은 헛것을 보고 잠꼬대를 하며 신음했다. 


글을 읽으며 일본 여행을 떠올렸다. 여지껏 해외에 나가본 일이라곤 총 세 번의 일본 방문이 전부다. 도쿄를 갔던 때가 6년 전이던가, 7년 전이던가.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도시의 밤. 호객행위를 하는 양복 입은 남자들을 피해 호텔로 들어섰고, 혼란하고 번쩍이는 야경을 보며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동행했던 그 또한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사장 한 명이 운영하는 작은 바에 앉아 풋콩을 까먹으며 그와 사장이 일본어로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말을 하는지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기도 했다. 그는 간혹 웃었고, 내게 그의 말을 통역해 주었으나 내 마음 한 편에는 왠지 모를 모멸감이 어른거렸다. 보이지 않는 벽을 두고 나를 완전한 이방인으로 만들어 소외를 시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일본 여행은 4년전, 대마도였다. 부산에서 간단히 배를 타고 갈 수 있었고, 멀미약을 먹고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대마도에 도착해 있었다. 작은 섬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이라고는 한국 사람들이 전부였다. 나는 작은 호텔 방을 예약해 주변을 산책했다. 대부분 걸어서 이동했다. 혼자 2박 3일을 갔던 터라 남는 게 시간이었다. 특별한 계획도 없었던지라 발길이 닿는대로 걷고 머물렀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이자카야에서 붕장어 튀김과 소바, 그리고 생맥주를 실컷 먹은 일. 계란 샌드위치를 하나 챙겨 홀로 갔던 미우다 해변에서 우연히 어떤 여성을 만나 저녁을 먹었던 일까지. 비의도적인 우연들의 연속이 나를 기쁘고 들뜨게 했다. 본의 아니게 일본은 내게 애틋한 여행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에는 삿포로에 가고 싶었는데. 어느 시에 나왔던 요코하마도. 갈 일이 있을까. 




풋콩을 삶는 비릿한 냄새는 태풍을 맞아 흔들리고 부러졌던 삼나무 숲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숲이 맹렬히 흔들려 무언가를 갈아엎고 변화 시키는 냄새, 죽을 것과 남길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비정한 자연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p.220


어린 시절부터 아무래도 미심쩍어 경계했던 숙부의 어떤 면들도 비단잉어의 흐드러지는 지느러미들이 불러일으키는 생경하고 이물거리는 톤 정도로 약화되었다. -p.222



말끝을 올리고 내리는 것으로 누군가는 남겨지고 누군가는 옮겨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 어쩌면 세상의 많은 일들은 그런 사소한 변별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 그후로도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레이디 - P99

저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안정감 없게 외롭게 가진 것 없게 내쳐진 채 나쁘게, 살게 될까.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문상 - P149

수집은 목록의 작성이고 애호는 취향의 드러냄인데 그런 걸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기란 어려웠다. 무엇보다 길어지지 않았다. 취향은 물질이 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책은 물질이고 원고지 매수로 카운트되고 가격으로 치환된다. -새 보러 간다 - P177

그렇게 해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가는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꿈꾸는 어떤 세계, 취향에 따라 샴푸를 고를 수 있는 백인 소녀의 세계, 혹은 혁명을 꿈꾸는 일개미의 세계,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아니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 일순 몸을 드러내는 어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아주 닫혀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건 없고, 그러니까 K에게 그런 세계는 허용되지 않고, 허용된 것은 집으로 실어 날라야 하는 채소나 과일 같은 것, 지불 없이 무상으로 얻은 그 몇 푼 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수백 배의 무게로 짓누르는 수치심과 죄책감 같았다. -쇼퍼, 미스터리, 픽션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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