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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꿈을 꿨다. 때는 폭설이 내렸다가 너저분하게 녹아내려 듬성듬성 흰 눈과 진흙이 뒤섞여 있었고, 행군은 끝이 없었다. 물 먹은 군화 속 발은 짓물렀을 뿐아니라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길 반복해 걸레짝과도 같았다. 사이즈에 맞는 군복이 보급되지 않아 소매가 긴 상의를 몇 번이고 접어야만 했다. 바지는 걸을 때마다 1cm씩 흘러내리는 것 같아 벨트를 꽉 조여맸다. 그러다 독일군에 의해 쑥대밭이 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세상은 차가웠고, 코와 볼은 발갛게 얼어 간지러울 쯤이었다. 흘러내리는 코를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부대원들 모두 기이한 고요에 적응하지 못했다. 마을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체가 널려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나무에 걸려 있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얼굴이 휑 뚫려 있었다. 굴러다니던 머리 하나는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고 삼키고 있던 피를 쏟아냈다. 마을 어귀에는 나치 깃발이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었고, 우린 그곳을 지났다. 처음 퍼렇게 질려 혀를 빼고 죽은 사람을 봤을 땐 토악질을 했다. 단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위생병이었다. 전쟁 중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부상병들을 데리러 지옥으로 발을 들여야 했다. 지옥 속 지옥. 사람 목숨은 파리와도 같았다. 점점 죽음에 의연해졌고, 무감해졌다. 우리는 가장 많이 죽이고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넓게 차지해야 했다. 그렇다고 믿었다. 늘 배가 고팠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건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내 이름은 로냐였고, 옆구리에 총상에 의한 흉터가 하나 있었다. 어쩌다 꿈에서 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거운 군화의 감각과 칼날같던 바람의 온도가 떠오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행복도 있고 눈물도 있다. 우리는 고통스러워할 줄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줄도 안다.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 우리 여자들이 바로 이 아픔과 고통의 길을 향해 용감하고 당당하게 나아갔음을 나는 밝혀야만 한다.
전쟁은 권력자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과정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국가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남자들의 차지였다. 그들의 세포의 일부에는 폭력의 씨앗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을 가져본다. 책에서도 말한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고.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고.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고. 어릴 때는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 싸우는 줄 알았다. 애초에 여자들은 총과 칼을 들지 못 하게 했고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총을 들고 탱크를 모는 건 남자들 뿐이었으니까.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싸울 때 여자들은 집을 지키고 땅을 지키며 경제를 위해 힘을 썼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여자들이 그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가정을 지키고 땅을 지켰는지 조명하지 않았고, 또한 참전 여자 병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감춰졌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6.25에 참전했던 여성 의용군들에 대해 배운 적이 있던가?
전쟁 속 여성들은 다루어진 적이 없을 뿐더러 현실에서도 외면 받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여성 군인들을 찾아가 그들을 인터뷰하고 텍스트로 옮겨 담았다. 그 과정도 적혀있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또 다른 전쟁을 겪어야만 했으므로. 사회적 시선, 편견과 트라우마. 남자들보다 여자들에게 엄격한 이 세계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들도 꽝꽝 언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어렵사리 세상 밖으로 나온 그들의 이야기는 남성들이 전했던 전쟁의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조금 더 섬세하다고 해야 할까.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에 어떤 필터가 한 겹 씌워져 있는 듯했다.
"행복이 뭐냐고 한번 물어봐주겠어? 행복...... 그건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야......." -안나 이바노브나 벨랴이, 간호병.
사실, 책을 구매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이 책은 오래도록 내 책장에 꽂혀 있었다. 나는 달에 한 번 씩 읽고 싶은 책을 구매하곤 하는데, 여러 권 중 한 권을 읽은 뒤로 이 책을 접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책 자체가 뿜어내는 무거운 아우라와 두툼한 두께가 나를 망설이게도 했다. 그러다 먼지가 쌓여가던 이 책에 관심을 둔 계기는 장항준 감독의 언급 때문이었다. 이처럼 어떤 타이밍은 아주 불시에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그들의 음성을 글로 옮겼기 때문인지 몰라도 읽을 때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낮은 침음 이후에 이어지는 음성. 망설이는가 하면 유쾌했고, 혹은 서글펐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들은 백발이 될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말하지 못 했다.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강요했다. 이 불평등을 논하기 위해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동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도 아직 휴전국가다. 전쟁은 끔찍하고 잔혹하다. 그러나 여자들이 겪었던 전쟁은 더욱 잔인했다. 그들은 국가를 지키러 갔음에도 적군이 아닌 아군으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지켜야 했다. 나는 그런 전쟁이 두렵다. 지금도 여성의 삶은 무수한 차별과 폭력,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이라 칭할 수 있다. 사람이 비로소 짐승으로 재탄생하는 전쟁이란 배경 앞에 여자들은 강해짐과 동시에 무력해질 것이다. 가장 최근에 남성들의 여성들의 군복무를 의무화해야 한다며 모병제가 청원에 올라왔던 걸 기억한다. 징병제 또한 과거 지배 계층 남성들이 정한 성차별의 일부가 아니던가. 역사적으로 병역의 의무는 '인간'에게 부과되었으나, 여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은 과거 남성중심사회에서는 여성들에게 이와 같은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갑작스런 전쟁 발발 시, 완벽한 약자가 된다. 싸우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총을 쥘 줄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도 재난상황에서 남성보다 여자의 사망률이 높다고 한다. 생존법에 대해 배우질 않아서.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중사, 고사포 지휘관.
그녀의 말이 이 책의 존재를 관철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무용담은 얼마나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알려졌는가. 러시아는 승리했으나 여성들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간 누군가는 부모로부터 쫓겨난다. 남자들과 몇 년을 생활하고 돌아왔으니, 여자에 대한 평판이 안 좋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녀의 동생들도 좋은 집에 시집을 못 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부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여성은 여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말하는 여자란 아름답고 고귀한, 약하고 순결한 여성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여성의 기준을 완전히 벗어난 꼴이 되었고, 사회는 그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생존의 결과는 죄악이었다.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괄시와 의심을 받았다. 여자가 어떻게 그 험악한 곳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찬양이 아닌 멸시를 받아야 하다니.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음에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니. 그들에게 전쟁이란 감히 꺼내지 못할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승리는 남성들만이 누린 것이고, 우리는 남성들만이 전쟁에 간 줄 알았나보다. 여자들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또한 그들은 사회가 정한 여성성을 지키고 싶어했다. 가끔은 립스틱을 바르고 싶어 했으며 치마를 입고 싶어했다. 요즘의 여성들은 사회가 정한 여성의 모습을 탈피하기 위해 화장품을 버리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이른 바 코르셋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전쟁통에 예쁜 게 뭐가 대수라고. 나는 그녀들을 존경하고 이해한다. 지금의 우리 또한 보여지기 위한 아름다움과 내면의 아름다움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달리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은 여성들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했던 것 중 하나다. 여성들은 아름다워야 했다. 그래야 좋은 남자에게 선택 받아 시집을 갈 수 있었으니까. 나조차도 그랬다. 보여지는 아름다움에 치중했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내게 전혀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화장품을 버리고 예쁘고 유행하는 옷보다 실용적이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들을 구매했다. 아름답기 위한 마름 보다 잘 먹고 건강하게 사는 걸 택했다. 그러니 조금이나마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었고, 먹지 못해 서럽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보호 받기 위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선택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삶. 누군가의 '나' 가 아니라 나의 '나' 가 되기 위한 삶. 책을 읽고 난 다시 한번 명확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우리 이야기는 꼭 안 써도 돼...... 우리를 잊어버리지만 마...... 당신과 내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잖아. 같이 울었고. 그러니까 헤어질 때 뒤돌아서 우리를 봐줘. 우리들 집도. 낯선 사람처럼 한 번만 돌아보지 말고 두 번은 돌아봐줘. 내 사람처럼. 다른 건 더 필요 없어. 뒤돌아봐주기만 하면 돼....
책에서의 전쟁, 그리고 승리는 결코 명예롭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실상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은 인간이 인간을 죽임으로서 얻는 결론이었다. 생명의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 땅에 묻힌 수많은 가죽들이 녹아 사라지고 나면 결국 똑같은 뼈이거늘.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어떻게 전장에 나가 싸웠는지. 비극적인 삶의 이면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우리는 잊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면 먼 훗날 또 다른 누군가들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줄 것이다. 이 책은 전쟁이 얼마나 잔악하고 슬픈 일인지를 말함과 동시에 세계가 깊게 묻어 두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말해준다. 진솔하며 처절한 전서.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인간적이었던 인간의 이야기. 나는 이 글을 마치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 볼 생각이다.
지금 녹음되고 있는 거지? 역사를 위해, 그렇지? - 엘레나 보리소브나 즈뱌긴체바, 사병, 무기제조병.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앎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 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 P170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공훈들만 가득한 황야에. 도도하고 결코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에. - P188
ㅡ기구도, 보다시피 다 오래된 것들이야. 바꾸기가 아까워서. 사람들과 한집에서 오랜 시간 함께 산 물건들은 비록 물건이라도 영혼이 깃드는 법이거든. 나는 그렇게 믿어. - P206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 그리고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앞에 섰을 때 놀라고 당황한다. 과거는 사라졌다. 과거는 뜨거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을 멀게 하고는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 - P255
고향을 등지고 전선으로 떠날 때 우리집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만 기억나.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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