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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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위로를 건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함부로 재단해서도 안 되며 파악해서도 안 된다. 섬약한 사람들의 겨울은 무척 길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눈을 치워서는 안 된다. 망설이다 허비하는 시간 속에는 오해와 애증이 난무한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감정들을 붙잡기에 나는 다소 뻣뻣하고 질기다. 


안희연 작가의 시집을 구매하게 된 계기는 그 중 수록된 '슈톨렌' 이라는 시 때문이었다.



 슈톨렌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요즘, 재택근무로 인해 현대인의 우울감이 증가하여 침잠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던데. 그들의 베개 맡에 곱게 인쇄하여 두고 오고 싶은 시였다. 우리가 사랑할 것들은 무수하다. 나의 작은 고양이들, 새로 선물 받은 잠옷, 협탁 위에 올려진 두툼한 책들. 사랑하다 보면 괜찮아질 날이 올 것이다. 빛보다 어둠을 먼저 찾던 나지만, 최근에는 밝은 면을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곤 한다. 그러다 보면 내 뒤를 잇는 그림자도 밝아질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들을 마음 한 구석에 심으며.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는 문장이 맴돈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이따금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릴 때도 있는 삶이지만, 오래 끓인 블루베리 잼을 상상한다. 단내가 부엌을 넘어 거실까지 꼼꼼하게 들어찬 공간. 식빵을 노릇하게 구울 때의 설레임. 우리는 그런 설레임들을 안희연의 시에서 배울 수 있다. 음울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며 정의하거나, 색을 변화시키는 문장들. 그런 문장들이 담겨있다. 


시를 읽다 떠오르던 여름 언덕. 이번 여름은 좋아하는 바다를 마음껏 가지 못 해 아쉬울 뿐이다. 내게 여름 언덕이란 파도가 치는 바다였는데.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실의에 빠지기 쉽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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