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산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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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이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신 그림자,

휘감아 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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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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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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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책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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