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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평점 :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켈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p1.
이주에 걸쳐 틈틈이 <일리아스>를 읽었다. 호메로스 시인의 그 위대하다는 서사시. 여러 사건이 등장하는 <오딧세우스>에 비해 <일리아스>는 두 나라간의 전쟁 이야기라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일리아스>의 긴박감에 빠져든다. 심지어 <오딧세우스>보다 더 재미있다.
<일리아스>는 헬레나로 인해 벌어지는 트로이족과 아카이오이족의 팽팽한 전쟁이야기요 헥토르와 파트로클로스의 뜨거운 사랑(우정) 이야기이다. 신들이 가세한 양쪽의 치열한 전투, 신들은(얄밉기도 하지)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고, 인간은 신에게 간청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한다. 이 두꺼운 책에서 훌륭한 장수들은 끝없이 죽어 가는데, 묘사가 생생하여 차마 죽는 장면(창이 차양과 뼈를 뚫고 들어가니 그 안에서 골이 박살났고 등등)을 읽지 못하고 뛰어넘기도 했다.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넘겨받기 위해 적장을 방문하여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을 꿇은 프리아모스의 애절한 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을 읽는 것도 괴로웠다. 그만큼 호메로스의 묘사가 뛰어나다는 것이겠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비유도 넘쳐난다. 그런 상황에 이처럼 적절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를 들어보자.
‘마치 서풍이 세차게 불어와 무성하게 자란 곡식들이 뒤흔들리고 이삭들이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처럼, 꼭 그처럼 그들의 회의장은 온통 술렁거렸다.’ ‘봄철에 우유가 통들을 적실 때면 수많은 파리 떼가 새까맣게 무리 지어 목자의 외양간 주위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듯, 꼭 그만큼 많은 장발의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을 향해 들판에 버티고 섰다.’ ‘마치 겨울철에 두 줄기의 산골 급류가 큰 샘들에서 움푹 팬 골짜기를 따라 세차게 흘러내리다가 골짜기가 마주치는 합수머리에서 섞을 때와 같이 꼭 그처럼 어우러져 싸우는 자들에게서 함성이 일며 노고가 시작되었다.’ ‘마치 북풍과 서풍의 두 바람이 트라케에서 갑자기 불어와 물고기가 많은 바다를 뒤흔들어놓으면 검은 물결이 금세 고개를 쳐들며 바닷가기슭을 따라 숱한 해초를 토해내듯이, 꼭 그처럼 아카이오족의 마음이 가슴속에서 뒤흔들렸다.’ ‘마치 작은 새들에게 죽음을 안겨다주는 매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찌르레기 때나 갈까마귀 떼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듯, 꼭 그처럼 아카이오이족의 젊은이들은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 앞에 전의를 잃고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특별한 남성과 아름다운 여성 앞에 붙이는 형용사(상투적으로 반복되는 수식어이지만 나는 좋기만 하다)는 또 어떠한가. 위대한 헥토르, 나무랄 데 없는 폴뤼다마스, 신처럼 존경받는 아이네이아스, 백성들의 목자 아킬레우스,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다른 아카이오이족,
예쁜 허리띠를 맨 여인들(그 허리띠 나도 하나만 갖고 싶다), 머릿결 고운 첩(그때는 매직 펌 따윈 없었으니 머릿결이 곱기란 쉽지 않았겠지), 복사뼈가 예쁜 알크메네(대체 복사뼈가 얼마나 예뻐야 이런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 볼이 예쁜 브리세우스(발그레하고 통통한 볼살을 가지고 있었겠지), 웃음을 좋아하는 아프로디테(항상 사랑에 빠져, 혹은 누군가를 사랑에 빠뜨려놓고 깔깔대며 웃었으리라)
호메로스의 책 두 권을 읽고 나니 마음이 든든하다.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고전의 새로운 발견! 옛것을 온전히 익혀 새것을 안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휙 날아온다. ‘온전히’ 라는 단어 앞에서 다시 겸손해져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