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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 전집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규종 옮김 / 시공사 / 2010년 11월
평점 :
단막극과 장막극을 합쳐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 체홉이 하도 유명하다길래 벚나무 동산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인상적이지 않아 그 뒤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지인이 체홉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어 그래? 다른 작품들은 괜찮은가 하는 생각에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전집이니 책도 당연히 두꺼울 수밖에.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쪽은 단막, 뒤쪽은 장막이다. 재밌게 읽었던 단막은 <곰>과 <청혼>이다. <좋든 싫든 비극배우>는 “내일까지 권총을 빌려주게”라는 주인공의 대사에서 매일의 삶에 대한 피로가 그대로 느껴진다. 단막극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체홉은 참 유머가 많구나, 인간의 삶을 요리 비틀고 조리 비트는구나, 여성 혐오증이 있구나 등등이다. 초창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을 향한 체홉의 태도는 깜짝 놀랄 정도로 부정적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시간이 되면 논문을 찾아 읽어봐야지 하며 생각하며 장막극으로 넘어갔다.
<이바노프> <숲의 수호신>(‘바냐외삼촌’의 골간이 된 작품) <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가 실려 있는 장막극은 굉장하다. 특히 <갈매기>와 <바냐 외삼촌>은 우리의 힘겨운 인생이 오롯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대화와 애정은 어긋난다. 어느 하나 악인도 없고 선인도 없다. 등장 인물이 입체적(도스도예프스키의 인물처럼)이기에 우리는 자신을 누구에라도 대입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역할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지만(여성은 단지 아름다운 외모와 행동으로 빛을 바랄 뿐).
체홉의 장막극은 소시민의 끝없는 노동, 실패한 사랑, 비참한 인생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인간의 삶이 한없이 가여워질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있을까? <세 자매>의 마지막 장면은 올가가 동생들을 얼싸앉은 채 “세월이 흘러 우리가 세상을 영원히 떠나면 사람들은 우리를 잊을거야. 우리 얼굴도 목소리도 그리고 우리가 몇 사람이었는지도 잊어버릴 거야. 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우리 다음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지상에는 행복과 평화가 찾아올 거야.....아 동생들아, 우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도록 하자!”(나는 이때 남해 마을 ‘파독 전시관’에서 틀어주는 영상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서 일하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우리 열심히 삽시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부유한 나라를 물려줍시다!”라도 외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말하는 부분이다. 번역가는 이 작품에서 그들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출구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글쎄, 나는 선뜻 동의하기가 주저된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니 러시아 음식이 왜 이리 먹고 싶어지는지. 특히 크바스가...
당신의 벚나무 동산은 무엇인가요? 나의 벚나무 동산은?
* 세레브랴코프 : 평생 학문을 위해 일했고, 서재와 강의실, 존경할 만한 동료들과 함께 했는데, 느닷없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이런 무덤 속에 갇혀서 날이면 날마다 속된 인간들을 보고, 하잘것없는 얘기나 듣고 있다니까. 난 즐겁게 살고 싶고, 성공을 사랑하며, 명성과 소음을 좋아해. 그런데 여기는 마치 유배지 같아. 매 순간 지난날을 동경하고,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지켜보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견딜 수 없어! 정말이지! 여기서는 누구 한 사람 내가 늙었다는 걸 용서하려고 하지.
엘레나 안드레예브나 : 기다리세요. 인내심을 가져요. 오륙 년만 지나면 나도 늙을 테니까.
<숲은 수호신> 2막 1장
* 니나 : 당신의 인생은 멋져요!
트리고린 : 대체 뭐가 멋지다는 겁니까?(시계를 본다) 이제 그만 가서 글을 써야 합니다.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서....(웃는다) 말하자면 당신은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겁니다. 그래서 난 동요하고 얼마간 화가 나기 시작한 거요. 나의 멋지고 산뜻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잠시 생각하고 나서) 사람이 밤이고 낮이고 간에 생각하면, 예컨대 달에 대해 생각하면 강제된 표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게도 나름의 그런 달이 있어요. 하나의 성가신 생각, 즉 나는 써야 한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밤낮으로 나를 괴롭힙니다......중편 소설 하나를 끝내자마자 무슨 일인지 벌써 다른 중편소설을 써야 하고, 그다음엔 세 번째, 그 후엔 네 번째 중편을....역마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끝도 없이 쓰는 겁니다. 다른 방도는 없어요. 대체 여기에 무슨 멋지고 산뜻한 게 있다는 건지, 묻고 싶군요. 오 얼마나 소름끼치는 인생입니까! 당신과 함께 있어서 흥분하고 있지만, 나는 매 순간 끝내지 못한 소설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있습니다. 저기 피아노를 닮은 구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는 걸 소설 어디선가 써먹어야지, 하고 말이오. 헤리오트로프 냄새가 나는군요. 얼른 기어해둬야지. 달콤한 향기, 과부의 꽃, 여름날 저녁을 묘사할 때 써먹어야지. 나 자신과 당신을 각각의 구절과 단어로 포착하고, 이 모든 구절과 어휘르 문학 창고에 서둘러 가두는 겁니다. 필시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작품을 마치고 나면 극장에 가거나 낚시하러 달려갑니다. 거기서 쉬면서 잊어버렸으면 하는 거죠. 그런데, 아닙니다. 머릿속에 이미 묵직한 철제 포탄이 굴러다니는 겁니다. 새로운 주제가 떠올라서 나를 책상으로 잡아당기고, 그러면 서둘러서 다시 쓰고 써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언제나 늘 자신으로부터 편안하지 못한 거에요.....................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던 젊고 좋았던 그 시절에도 글을 쓰는 일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어요. 하찮은 작가는 특히 운이 없을 경우에 자기가 꼴불견에 재주없고 쓸모없다고 여겨져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초조하게 됩니다. 돈 없는 노름꾼처럼 당당하게 두 눈을 바라보는 걸 꺼려하면서도 누구에게 인정받지도, 주목받지도 못한 채 문학과 예술 관계자들 주변을 억제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겁니다......
<갈매기 2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