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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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이치로의 산문집을 모아놓은 것이다. 네이버에 작가의 이름을 검색하니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 여체 숭배주의자 등의 단어들로 가득하다. 자극적인 문구들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물론 그의 (초기)소설과 산문이 다르긴 하겠지만, 이 책은 그러한 내용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체는 담백하고, 정직하며, 서늘하다.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가 떠오른다. 모르겠다.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총 다섯 개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그늘에 대하여’ 는 일본인이 정서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늘에 대한 예찬이다. 일본식 건축과 그늘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여러 글 중 단연 으뜸이다. 이 글을 읽고 그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환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게으름을 말한다’에서 작가는 게으름 피우기를 동양인의 특색으로 이름 붙인다. 왜 동양인은 게으름을 가지고 있는지, 게으름이 꼭 나쁘게만 인식되어야 되는지에 서양의 문화에 비교하여 ‘진지하게’ 풀어간다. 무척이나 재미있다. ‘연애와 색정’은 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동양인과 서양인을 비교하고, 일본 문학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다. ‘손님을 싫어함’은 손님을 싫어하고, 혼자 있는 것을 더욱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여행’은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이며, 기차를 타면서 느끼는 생각들이다. ‘뒷간’은 푸세식 뒷간에 대한 예찬이 담겨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었다. 참 아름다운 글이다. 글 안에 작가가 살아가며 깊게 생각했던 관점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날카로운 그의 시각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늘에 대하여’ 에세이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필사를 하고 싶다. 한 문장도 버릴 것이 없다.

 

* 중국인은 또한 옥이라는 돌을 사랑하는데, 저 묘하게 살짝 흐린 느낌이 드는, 몇 백 년의 오래된 공기가 하나로 뭉친 듯한, 속까지 거슴츠레하게 둔탁한 빛을 머금은 돌의 딱딱함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우리 동양인만이 아닐까. 루비나 에메랄드와 같은 색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금광석과 같은 광채가 있는 것도 아닌 저런 돌의 어디에 애착을 보이는 것인지, 우리들로서도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그 흐린 표면을 보면 중국의 돌다운 느낌이 들고, 오랜 과거를 가진 중국 문명의 앙금이 저 두툼한 어떤 흐릿함 속에 퇴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중국인이 저러한 색채나 물질을 선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끄덕여진다. 21-22

 

* 일찍이 소세키 선생은 <풀베개>에서 양갱의 빛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양갱의 빛깔 역시 명상적이 아닐까. 옥처럼 반투명의 흐린 표면이 속까지 햇빛을 빨아들여서 꿈꾸듯 발그스레함을 머금고 있는 느낌, 그 색조의 깊음, 복잡함은 서양의 과자에서 절대로 볼 수 없다. 크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천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양갱의 색조도 그것을 칠기 과자그릇에 담아서, 표면의 색을 겨우 알아볼 어둠에 잠기게 하면 한층 더 명상적이 된다. 29.

 

*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67

 

* 그러므로 일본인의 이는 하루하루 새하얀 진주색이 되고, 그것만으로 미국에 가깝게 문명인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에게 쾌감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려는 이상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원래 일본에서는 덧니나 충치로 인해 가지런하지 못한 이를 자연스러운 애교로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너무 빛깔이 새하얀 이가 아름답게 죽 나란히 있는 것은, 어쩐지 잔혹 잔인한 느낌이 들게끔 한다. 82.

 

* 며느리가 부모를 조심하면서, 그늘에서 남편에게 안겨 애무해 주도록 바라는-수줍은 태도 속에서 뭔가 그것이 엿보이는-그 모습에, 많은 남자는 말하기 어려운 매혹을 느낀다. 방종하여 노골적인 것보다도, 내부로 억제된 애정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때로 무의식적으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나는 것이 한층 남자의 마음을 이끈다. 색기라는 것은 대개 그런 애정의 뉘앙스이다. 그 표현이, 어렴풋한, 부드러운 뉘앙스 이상이 되어서 적극적이 되면 될수록 ‘색기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137.

 

* ‘좀 더 빠르게’가 시대의 유행이 되어 있으므로, 모르는 사이에 일반 민중이 시간에 대해서 인내력을 잃어, 가만히 한 가지 세상사에 마음을 진정시켜 몰두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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