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몽타주 - 서울 1988년 여름,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류동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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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988년 여름 말한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이란 부제가 달려있는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작가이자 화자인 자신이 1988년 여름의 일을 자서전적 요소를 띤 허구로 만든 것이고 2부는 1부의 자신이 쓴 글을 분석한 재현의 재현이다. 1부는 소설 형식이다. 화자는 그해 24살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 2학년 학생이다. 그는 흉흉한 시국 속 어느 출판에서 몰래 <자본론>을 번역하여 그 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단상 형식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해 여름으로부터 10년 후 화자인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지방 국립대학 교수가 된다.

   1부의 화자였던 저자는 2부에서 비판가의 위치로 되돌아와 자신이 쓴 이야기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쓰여졌으며, 무엇이 허구인지 스스로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들이 글 속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는지 보여준다. 작가이자 동시에 비평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의 글은 처음이라 매우 신선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을 이렇게 표현한다. ‘작가와 비평가가 같은 사람이라면 그가 완벽한 무의미함이나 해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한, 소설은 비평을 예상할 것이며 반대로 비평은 소설에 맞추어질 것이다. 즉 재현의 재현이 재현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작동하는 셈이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것. 기억을 재현하는 것. 일어난 사건을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하여 기록하는 것. 자신이 기록한 삶을 다시 분석하는 것. 꽤 재밌는 방법이다. 한번 시도해 보고 싶군. 얇은 책이라 금방 읽힌다.

 

# 사실 내 독일어 실력은 일단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은 다음, 그것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한국말이 되도록 문장을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비유하자면 낱낱이 흩어져 있는 많은 레고 조각들을 모아서 원래 모습이 무엇이었을지 상상하면서 다시 조립하는 작업과도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완성품을 만들고 나서도 어떤 때는 레고 조각이 남았고 또 어떤 때는 모자랐다. 남는 조각은 버리고 모자라는 조각은 적당한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원래 우주정거장이었을지도 모르는 레고 세트로 나는 우주선을, 심지어는 로봇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26-27

 

#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가 이를 포착하고 있다. 언어는 궁극적으로 대상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적 본질은 인간이 사물을 명명한다는 것”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명제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90

 

# “네 저는 진실을 말하지 않은채 진실을 말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해요. 결국 문학이란 정확하게 그것이지요. 은밀하게 진실을 말하는 능숙한 거짓말 -시몬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중 126

 

# 당신은 내가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며,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사랑한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중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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