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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어 막 잠의 세계로 빠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문명의 이기는 종종 삶의 질을 방해한다. 전화를 받고 나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책을 펼쳤는데,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일찍 자려다 되려 당해버렸다. 책을 펼치는 게 아니었는데. 하루키의 글은 갈수록 노련해져서 독자의 마음을 가볍게 휘어잡는다. 이 정도 쯤이야 하는 태도로.
줄거리는 간단하다. 다자키 쓰쿠루 라는 주인공이 고등학교 때 만난 네 명의 친구들과 똘똘 뭉쳐 깊은 우정을 나누다 대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친구들이 다시는 쓰쿠루를 만나고 싶지 않다며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한 것. 쓰쿠루는 너무 깊은 충격을 받아 그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라라는 여성에게 고등학교 시절의 일을 털어놓게 되고, 그녀는 쓰쿠루에게 그 친구들을 만나 이유를 물어봐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리하여 쓰쿠루가 한 명씩 친구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
자신에겐 색채가 없다고 생각하는 쓰쿠루. 나와 가장 친한 친구도 자신에겐 색채가 없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종종 쓰쿠루처럼 말했다. “난 모든 것이 평범해. 키도, 학력도, 외모도, 성격도, 취미도.”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처럼 개성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사람은 드물다. 쓰쿠루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쓰쿠루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
1949년생의 작가는 여전히 고등학생들의 감수성을 그려낼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 초창기 <상실의 시대>를 썼던 그때에 비해 글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이것이 하루키가 가진 힘이다. 글을 읽다보니 온다리쿠의 <밤의 피크닉>이 떠오른다. 고등학생들이 밤을 새어 길을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다섯 명의 친구들과 겹쳐진다. 그런데 쓰쿠루와 사라는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할까? 결혼할 수 있을까?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로 끝이 맺어지니 살짝 괴롭다. 네루다의 시 구절처럼 ‘한때 나였던 소년은 어디에 있을까? 계속 내 안에 남아 있나, 아니면 떠나버렸나?’ 마음이 아득해진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하루키는 역시나 이번 작품에서도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제목부터 전면 들여?왔다. 작가 덕에 음악의 세계도 확장된다.
#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32
#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