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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묘약 - 프로방스, 홀로 그리고 함께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여행이 너무 너무 가고 싶다면? 내가 취하는 방법은 두 가지. 떠남이 주제인 영화를 보거나 여행 책을 읽는 것. 지금 나의 상태는 시간은 많은데 돈은 조금밖에 없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집어들은 책. 프로방스 여행기를 담은 이야기. 프랑스에선 파리밖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간다. 작가 김화영 교수는 프랑스 소설 번역가로 유명하며, 그가 직접 저술한 책들 또한 깊이가 있다. 그러니 더더욱 마음이 끌릴 수 밖에. 표지도 얼마나 산뜻한지, 푸르름이 뚝뚝 묻어난다. 이 책은 저자가 프로방스에서 파리까지 여행한 여정을 산문으로 옮긴 것이다. 시기는 2011년에서 2012년 두 해에 걸친 여름이지만 그 속에는 30년 전에 저자가 프로방스에서 공부하였던 시간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의 여행은 엑상프로방스에서 시작된다. 거기서 그는 세잔의 길을 거닐며 신선한 과일과 빵을 먹으며 사색에 잠긴다. 글에서 묘사되는 풍부한 음식과 와인들은 읽는 이를 너무도 괴롭게 한다. 차가운 백포도주를 마시고, 단맛이 풍부한 멜론에 코냑을 채우고, 짭짤한 햄과 치즈와 고기를 먹고.,,, 음식 묘사가 얼마나 생생하고 사실적인지 당장이라도 비행기 표를 끊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생긴다. 책을 읽으며 꼭 이곳에 가리라 몇 번이나 다짐했다.
저자는 알베르 카뮈의 집을 방문하고,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정신병원을 둘러보며, 조르주 상드의 동네에 머문다. 그 밖에도 마르셀 프루스트, 말라르메, 장 그르니에, 지오노 등 뛰어난 작가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그의 여정은 차분하고 아름답다. 문장 또한 유려하고 품위 있어 글을 읽고 나면 괜히 내가 귀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습도 높은 여름, 이 책을 읽으며 프로방스의 깨끗하고 선명한 여름을 맛보았다. 그의 <알제리 기행>도 읽어봐야겠다.
# 유럽에서는 기다림의 지혜가 없으면 인생살이가 우울해진다. 13.
# 삶의 기쁨은 바로 이곳, 과일과 채소와 소금과 기름과 향료의 색채와 냄새가 소용돌이치는 이 시장에서, 즐거운 표정들 속에서 빛난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슈퍼와 달리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이 눈빛과 목소리와 미소로 만난다. 프로방스의 아침 시장에 우울한 얼굴은 없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29.
# 프로방스 여름날의 타오르는 화염이 땅속의 서늘한 물을 만나 과육 속에 썩지 않는 시간의 단맛으로 스며들면, 우리의 혓바닥에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만나 삶의 희열이 된다. 31.
# 문자 도착. 베네치아는 새벽 4시다. “BYC 신설점. 회원 대상 10% DC. 행사기간 9월 1일부터 11일까지 11일간.” 서울의 속옷 상점이 보내는 광고가 신새벽 머나먼 베네치아의 여행지까지 찾아온 것이다. 월드 와이드 웹의 세계화가 주는 벌이다. 저 먼 곳에서 지칠 줄 모르고 기다리는 비루한 일상이 꿈같은 바캉스의 시가 끝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보내는, 산문적인 너무나도 산문적인 신호다. 150.
# 길고 긴 여로의 끝. 마침내 도착한 집.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서늘한 물로 손과 얼굴을 식힌다.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덧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오! 목을 쓰다듬는 바람의 가벼움이여, 날아갈 것 같은 홀가분함이여! 나는 여행에서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수단으로서의 긴 여행은 끝났다. 이제 설레는 기대와 즐거움의 시간만이 망망대해처럼 앞에 펼쳐진다. 움직임은 수단이고 머무름이 비로소 삶인 것인가>? 아니, 움직임 속의 짦은 머무름, 그것이 삶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오른발이 아직 뒤에 있을 때 그 중심에 머무는 몸의 짧은 순간, 전신의 모공을 열어 빨아들이는 세상의 빛과 냄새와 소리와 촉감, 그것이 여행이다. 165.
# 그는 알고 모르는 것의 구별이 확실하고 아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정확, 간명하게 설명할 줄 아는 명쾌하고 상쾌한 지식인이다. 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