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미학 - 니체에서 후기구조주의까지
피종호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명랑하다 -실러의 희곡 <발렌슈타인> 프롤로그 마지막 행

 

    얼마 전 친구가 아는 지인들과 합석하여 밥을 먹었는데, 그 중에 곧 새 영화 개봉을 앞둔 젊은 영화감독 한분이 있었다. 홍상수 영화의 여파로 감독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에 바로 앞자리에 앉았지만 별로 대화를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그 감독이 강사로 있는 대학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대한 내용으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곧 우리는 ‘미학’에 관해 살짝 열띤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벤야민, 아도르노부터 시작하여 보드리야르,엔디워홀이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그는 엔디워홀을 매몰차게 저평가하였으나 글쎄....) 니체까지 이르렀을 때, 문득 니체에 관한 책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잠자코 입을 다물고 감독의 말을 경청할 뿐. 그는 미학 담론에서 니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토론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해체 미학> 아래 적힌 “니체에서 후기구조주의까지”라는 소제목을 보았을 때 주저 없이 손을 뻗은 건 당연했다.

   이 책은 저자인 교수가 그동안 쓴 논문들을 엮은 책이다. 그래서 읽다보면 왠지 공부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총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고, 니체의 디오니소스 신화로 시작하여 보드리야르의 몸의 위기로 끝이 난다. 논문답게 독자들이 모든 학자들의 이론을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글을 쓰고 있기에 대충 읽어도 어렵고 꼼꼼하게 읽어도 어렵다. 이해가 안된 상태로 책장을 넘긴 부분도 많지만 9편의 논문을 읽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니체는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초인의 이미지는 ‘바다, 번개, 광기, 마지막 인간, 창조하면서도 몰락하는 자’ 등 비유적으로 나타난다. 삶에 집착하는 니체는 현실주의적인 니힐리스트이면서도, 디오니소스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자이다. 니힐리즘에 대항하는 니체의 웃음은 이성비판적 웃음이다. ‘크게 웃는’ 초인의 웃음은 현실의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면서도 세계를 고찰하는 방법이다. 그는 미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미’라고 규정한다. 그의 미학은 원칙적으로 인간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추악함을 드러내는 삶의 범주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거하던 산에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에게 삶의 의지에 대해 설파하는 것이 곧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통과 관능적 쾌락 속에서 인간을 초인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1916년에 시작된 다다이즘은 “초현실주의 선언문”이 처음으로 발표된 1924년까지 유럽에 널리 퍼진 문학 및 예술운동으로 표현주의, 큐비즘, 미래주의와 상호연관성을 지닌다. 다다이스트들의 출발점은 표현주의라고 볼 수 있지만, 큐비즘과 미래주의의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다다이즘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는 예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삶에서도 실현되도록 구상한 것이다. 이는 유럽의 이성주의와 휴머니즘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부르주아의 삶을 비판하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다이즘의 우연의 미학은 예술기법적인 면에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문조각, 벽보, 머리카락, 모래, 유리 등을 붙여 만든 콜라주, 동시성의 기법에 영향을 받은 자동기술법, 실제의 대상물을 문지르면서 이미지가 드러나 보이게 하는 기법인 프로타주, 물건의 폐품을 모아서 만드는 기법인 아상블리주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아도르노는 헤겔보다도 더 예술의 정신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그는 헤겔의 미학적 합리성을 부정하면서,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미 자체를 모방한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이 자연미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미 그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다. 유대주의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는 아도르노는 1930년대의 독일의 파시즘을 역사진행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형식적으로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서구문명의 극치라고 이해한다. 벤야민이 대중과 문화예술의 치유적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반면에 아도르노는 기만적인 관계를 기술한다. 그에게 있어 대중예술은 조작에 의해 대중을 지배하고 동일성을 강요하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다. 그 중 재즈음악의 아도르노의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재즈음악은 능동적이고 주관성을 자극하는 쇤베르크의 무조음악과는 반대로 상품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음악은 교환의 강요아래 놓여 있다.

 

   상징주의자인 발레리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순수문학의 대변자이다. 발레리가 구상하고 있는 우연의 미학은 비정치적이면서 정치적이며, 예술의 자율성을 갖게하면서도 참여예술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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