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매체에서 가끔 저자가 언급하는 거침없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걸 보면, 그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롤랑 바르트가 쓴 <저자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독서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역시 책은 매우 훌륭하다. 뛰어난 철학자들의 미학 담론을 읽고 있으면, 어쩜 그렇게 말들을 잘하시는지, 나도 이런 분들과 얘기라도 좀 나눠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많이 알려진 철학자들이라 읽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이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거나,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 같다.

   한 권의 책에 많은 미학 담론이 들어있기 때문에, 압축적인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1장은 벤야민 파트인데 만약 그에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휙휙 넘겼을 뻔했다. 7장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에 관한 책은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놓친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작품 그림들도 도움이 되었다. 깊이 있는 미학 책을 읽으니, 마음까지 즐겁다. 왠지 조금 똑똑해진 느낌이다.

 

1. Walter Benjamin, 1892-1940

   순수한 언어는 번역=원문의 동일성 속에 있지 않다. 그 언어는 번역가능성, 즉 원작과 번역의 차이, 그 번역과 다른 번역들의 차이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언어의 진정한 본질은 신의 말씀처럼,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수립의 기능, 사물의 참된 모습을 현전시키는 개시 기능에 있다.(상기)

   파사주는 교환가치의 신전이다. 벤야민은 건축, 사진술, 광고 그래픽, 몽타주 등 생산력의 발전이 해방시킨 다양한 예술적 형상화 방식에 주목한다. 그는 봊게의 고유성을 인정한다. 가령 ‘진품성’이라는 개념은 위조 앞에서는 힘을 발휘해도 복제 앞에서는 무력하다. 동시상영되는 영화예술에는 아예 원작이 없다. 작품의 진품성은 그 사물의 ‘지금, 여기’와 결부되어 있기에 아무 때나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복제는 원작의 시간적, 공간적 현존성을 위협한다. 이로써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은 예술품의 진품성”,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아우라의 붕괴)

건축물의 수용은 촉각과 시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촉각적 수용은 주의력의 집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익숙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건축의 경우 그러한 촉각적 수용은 상당할 정도로 시각적 수용까지도 결정하게 된다.

   영화예술은 작품으로의 몰입을 막아 관중으로 하여금 늘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한다. (소격효과처럼) 극중 배우와 인격적 일체감을 맛보는 연극과 달리, 영화의 관중들은 스크린 속의 배우의 연기를 시험하는 냉정한 카메라의 태도를 취한다.(요즘관객은 그렇지 않지만...)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작품을 “한 개의 조각으로, 참된 세계의 파편으로, 상징의 토르소로 분해한다.” 순수한 언어는 하나의 개별 언어나 하나의 개별 작품 속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진리는 오직 파편들의 불연속 속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2. Martin Heidegger, 1889-1976

   예술작품은 사물적 측면을 갖고 있다.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작품은 우선 돌이며

나무이며 물감이며 소리다. 하지만 작품은 동시에 이런 “사물적 차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 “다른 어떤 것” 바로 예술의 본질을 이룬다.

도구의 개념 - 하이데거에 따르면 도구는 인간에 의해 제작된다는 점에서 작품과 비슷하다. 하지만 작품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자족성을 갖는다. 일상생활속에서 구두는 그저 구두일 뿐이다. 하지만 고흐의 작품 속의 구두는 다르다. 거기서 우리는 농민의 삶의 터전이 되는 들과 밭고랑, 즉 습기와 풍요로움을 머금은 대지를 본다. 이렇게 고흐의 작품은 구두의 도구존재를, 그 모든 삶의 연관성들 속에서 비로소 드러내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구두라는 존재자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모던의 예술문화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한 수집과 진열의 문화다. 여기서 작품들은 그것이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리고 한갓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박탈, 세계의 붕괴라 부른다.(모던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보수주의와 그것을 긍정하는 벤야민의 진보적 태도가 극적으로 충돌)

   오늘날 작품은 더 이상 감각적 직관의 대상이 아니다. 새로운 예술은 향유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미적 주체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안으로 연장되어 들어온 현실의 객관적 과정에 대한 진리이다.

   사회의 타자로 남기 위해 예술은 끝없이 자신을 혁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된다.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아도르노의 사상은 크게 보아 가상, 진리, 화해라는 세 개념의 연관으로 이루어진다.

 

3. Theodor W. Adorno, 1903-1969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예술은 제 본질로 여겼던 특성을 잃어버렸다. 현대예술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다. 회화는 재현을, 음악은 조성을, 시는 의미를 포기하고, 연극은 부조리해졌다. 카프카와 베케트의 작품은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들의 작품은 현실을 소리높여 비난하지도, 언젠가 도래할 유토피아도 제시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그 모든 부정성을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그 끔찍한 삶의 조건에 계속 깨어 있게 해준다.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예술은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의 현존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다”.

 

4. Jacques Derrida, 1930~

   데리다는 고흐가 그린 구두가 한 켤레라는 사실을 의심한다. 자신에게는 그게 각각 다른 구두에 속하는 왼쪽 신발들로 보인다는 것이다. 샤피로와 하이데거의 공통의 오류는 작품의 진리를 단 한번에 현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의미결정론에 있다. 그리고 이 결정론은 저 두개의 구두를 ‘짝’으로 단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저 구두는 어쩌면 ‘짝’이 아닐 수 있다. 데리다에게 작품의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 한번에 현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데리다의 기표는 결코 현전에 도달하지 못한다. 재현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텍스트 밖에는 그것이 닮아야 할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속에서 의미를 연기하면, 자신의 의미를 끝없이 다른 시니피앙들에게 연기시키면서 산포되는, 그리하여 결코 현전에 도달하지 않는 텍스트들의 놀이뿐이다.

 

5. Michel Foucault, 1926-1984

   유사 -원본과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

상사 -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

푸코는 현대의 추상회화가 실물을 닮기를 포기함으로써 현실의 재현이기를 거부한다면, 마그리트의 작품은 실물을 빼닮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물의 재현이기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일종의 칼리그램이다 마그리트는 칼리그램을 파괴하기 위해 칼리그램을 사용한다. * 칼리그램 - 에덴 동산에서 사용하던 언어는 낱말의 청각적 영상 속에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시각적 영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이미 타락한 바벨의 언어 때문에 낱말이 사물의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클레처럼 재현의 공간을 붕괴시키고, 칸딘스키처럼 재현의 원리를 파괴한 마그리트. 하지만 같은 일을 해도 그는 클레와 달리 재현의 낡은 공간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칸딘스키와도 다르게 그림이 사물을 닮도록 그대로 내버려두는 역설을 두었다. 마그리트는 유사를 가지고 재현을 파괴한다. 그의 그림은 원본과의 동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림의 이미는 탈동일화한다.

 

6. Gilles Deleuze, 1925-1995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의 주체는 베이컨의 ‘살’을 ‘고기’로, 즉 포스트-프로이트적인 리비도적 욕망의 주체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현을 포기하고 베이컨이 그리고자 한 것은 감각이다. 베이컨의 작품의 효과는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이다. 그의 그림은 폭력적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스토리로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베이컨의 그림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성’을 근거로 인간을 다른 동물 위에 올려놓는 인간중심주의는 무효가 된다.

   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한다. 이 힘을 들뢰즈는 리듬이라 부른다. 회화는 히스테리다. 그것은 우리 앞에 신체의 현실을 세우고,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선과 색을 세운다.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벗어나려는 모순적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베이컨은 디아그람이라는 전략을 도입한다. 그는 화폭에 우연적인 표시들을 하고, 어떤 부분은 쓸거나 문지르고, 그 위에 여러각도에서 물감을 뿌리기도 한다.

들뢰즈에게 회화는 단순히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회화는 감각의 폭력을 통해 신체의 변형을 이룬다.

 

7. Jean-Francois Lyotard, 1924-1998

   바넷 뉴먼의 작품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 안에는 알아볼 만한 대상도 없고, 그 이전에 어떤 형체도 없다. 그저 몇 개의 수직 혹은 수평선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색면, 그게 전부다. 작품 안에는 식별 가능한 대상이 없다. 그저 주인 없는 물건처럼 덩그러니 던져진 사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것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가? 이 그림 앞에 선 관찰자의 체험 혹은 느낌. 바로 거기에서 이 그림은 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을 묘사하기를 포기하고, 이 침묵으로서 이 세계에는 예술로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뉴먼에게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회화는 주제를 가져야 한다. 그 주제란 숭고를 가르킨다.

   리오타르의 숭고론은 현대예술이 재현을 포기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비구상 예술에 적용되는 논리이다.

 

8. Jean Baudrillard, 1929-

   소비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이다. 인간은 미디어의 확장이며, 하이퍼 리얼리티가 실제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어버려, 인간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시나리오의 배우가 되어버렸다. 벤야민의 복제가 원작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데에 그친다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그 아우라를 자신이 뒤집어 쓴다. 이데올로기는 더이상 실재를 거짓으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실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전략을 통해 작동한다. 가량 걸프 전쟁은 전폭기의 조종석에 달린 스크린을 통해 일종의 전자오락 형태로 제시된다. 이를 통해 고전의 실제의 상황, 즉 전쟁의 참혹함은 간단히 증발해 버린다. “걸프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도발적 언급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피티 예술과 팝아트는 보드리야르 이론과 친화성을 가진다.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예술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라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시뮬라시옹을 통한 실재의 사라짐은 팝아트나 극사실주의를 넘어 현대예술 일반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예술은 사라지는 모든 형태들처럼 시뮬라시옹을 통해 사라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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