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슈타포 - 히틀러 비밀국가경찰의 역사 KODEF 안보총서 43
루퍼트 버틀러 지음, 이영래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

 

   저자는 영국의 작가이며 저널리스트로 제3국과 2차 대전에 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이 책은 두툼하지만 그림이 많이 실려 있고 주요 인물과 사건이 네모 박스 안에 정리되어 있어 보기가 편하다. 사진들을 보며 글을 읽으니 마음에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게슈타포의 탄생에서부터 제국의 종말까지 적고 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히틀러를 중점으로, 그와 관련한 인물,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책으로 백장미단과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하이드리히, 히믈러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에 관해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정작 그것에 관한 책들을 자세히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홀로코스트 하면, 유대인 대학살, 디아스포라, 히틀러와 게슈타포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더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하면 글쎄.

   몇 년 전 베를린을 여행하다 유대인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박물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작품으로 건축물 자체로도 매우 유명한 곳이다. 매우 정갈하고, 소박한 박물관이었는데, 여러 장소 중 ‘홀로코스트 타워’라는 방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며 사방은 벽으로 덮여있다. 오로지 24m 높이에서 빛줄기가 내리는 데, 그곳에 들어간 순간 서늘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때 유대인들의 마음을 100만분의 1이라도 느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공간은 낙엽이라고 이름붙여진 곳인데 유대인들의 얼굴이 만 여개의 금속 얼굴로 만들어져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금속 얼굴 위로 걸으면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린다. 입을 벌리고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금속 얼굴 위를 밟고 차마 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대부분도 아무말 없이 가만히 땅바닥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베를린에 머물면서 몇몇 유대인 관련 기념관을 방문했고 아파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홀로코스트를 잊고 살았다. 그런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서였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즐거운 일상에 괜히 찬물을 끼얹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책을 읽으며 괜히 미안해진다. 잊고 살아서, 죄송합니다.....

 

# 바이마르 공화국 - 1919년 패전 독일의 잿더미에서 생겨나 1933년 제3제국이 탄생할 때까지 존속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제헌의회는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였다. 조약은 전쟁의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 있다고 규정하고 군대와 공무원 조직은 유지하되, 군비를 축소하고, 영토를 반환 및 할양하며, 무장을 해제할 것 등을 요구했다. 13

 

# 히믈러의 왕국 - 하인리히 히믈러는 파더보른의 고대 베스트팔렌 시가 근처 숲에 자리한 베벨스부르크의 높은 벽 뒤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왕국을 만들었다. 이곳의 지배자는 고지식한 안경잡이 관료가 아니라 제복과 정교한 기장들, 그리고 프리메이슨의 의전을 른 장식물에 집착하여 낭만주의적 성전을 만들어낸 히믈러 본인이었다.

1934년 여름 히믈러가 손에 넣은 베벨스부르크 성은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12명이 등장하는 전설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일종의 카멜롯으로 여긴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그가 직접 선발한 친위상급대장들이 전설 속의 원탁의 기사 12명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두 귀족’이라고 주장했다. 선택된 친위상급대장들은 정기적으로 식당에 있는 커다란 참나무 테이블에 모여야 했다.

성의 한쪽 모퉁이에는 성배를 모시기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히믈러는 아주 오래된 아리아인의 종교로부터 기독교인들이 앗아간 신성의 상징인 성배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하실에는 현대판 기사들의 유골이 담긴 석재 대좌 12개와 함께 그들의 친위대 단검과 개인무기가 놓여 있었다.

히믈러는 다양한 무기들을 수집하고 거대한 도서관을 세워 독일 제1국을 세운 ‘매사냥꾼’ 하인리히 1세에게 헌정했다. 히믈러는 자신이 그의 후손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인리히 왕이 사망한 날 자정이 되면, 히믈러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영웅인 이 어둠의 왕과 교감하곤 했다. 1935년 히믈러는 친위대에 독일 고대유산연구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창설하고 유명 나치 학자들을 고용했다. 이들은 원정대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아 성배를 찾아 아이슬란드로 가거나 순수 아리아 혈통을 가진 조상들의 흔적을 발굴하기 위해 이란을 찾는 등 세계 전역을 탐사했다. 3년 뒤 친위대는 그들의 가장 야심찬 티베트 원정에 착수했다. 인종적 정체성의 절대적인 지표를 만들기 위해 티베트인들의 시체를 측정하고 검사하는 필름이 남아 있다. 47

 

 

# 나의 투쟁 - 히틀러의 정치철학을 구체화한 <나의 투쟁>은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 제 1권은 바이에른 주 란츠베르크 암 레흐의 요새 감옥에서 씌어졌다. 히틀러는 미수로 끝난 비어홀 폭동으로 인해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편안한 환경에서 9개월을 복역한 것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그는 충실한 추종자 루돌프 헤스에게 자신이 구술한 내용을 받아쓰게 할 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제1권은 1925년에 발행되어 9400부가 팔렸다. 완성본은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될 때까지 100만부 이상 팔렸다. 130

 

# 게토 - 폴란드에는 나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지명이나 선출을 거쳐 유대인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뒤이어 바르샤바에 게토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39년 11월 4일 무장한 게슈타포 요원들이 유대인위원회의 위원들을 소집시킨 뒤 모든 바르샤바 유대인을 3일 내에 게토로 지정된 지역으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포고문을 읽었다. 한스 프랑크 총독이 반포한 포고문에는 유대인위원회가 독일의 모든 명령을 받아들이고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유대 위원회는 다음달까지 유대인 지구의 심장부에 있는 34개 거리 모퉁이에 “위험, 전염 지대”라는 대형 나무 표지판을 세워야 했다. 이 지역에는 5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수용되어 외부와 격리되었다. 불법으로 ‘유대인 거주 지구’를 떠난 사람이나 이에 조력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게토는 의도적으로 황폐한 지역에 세웠고, 외부에서 온 유대인들까지 그 속에 몰아넣었다. 몇 달이 지나자 집이 망가졌고, 위생시설과 하수처리시설이 붕괴되어 거리는 더 이상 청결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이질과 결핵, 발진티푸스가 창궐했다. 바르샤바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식량 배급이 급격하게 줄었다. 히믈러는 게토이든 아니든 폴란드 내에 유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1942년 여름 그는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바르샤바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동을 명령했다. 10월까지 31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인종말살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해 가스실로 향해야 했다. 149

 

# 백장미단 -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대한 반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점점 더 강화되었다. 나치 독일의 젊은이들이 만든 가장 유명한 반체제 조직은 1942년 뮌헨 대학의 학생들이 결성한 백장미단이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공포와 테러라는 철의 장막을 쓰러뜨리자”였다. 게슈타포 사냥의 희생양이 된 이들의 구성원 중에는 한스와 쇼피 숄 남매도 있었다. 그들은 체포되어 즉석재판을 받고 1943년 2월 22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쇼피 숄은 게슈타포의 심문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한 일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각성하여 자각하게 될 것이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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