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개정판
로버트 S. 위스트리치 지음, 송충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정독 도서관 앞마당에는 벚꽃이 활짝 피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도서관은 온통 벚꽃 향기로 가득하다. 이렇게 햇살 좋은날, 벚꽃이 분분이 날리는 날,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었다. 꼭 이런 날 읽어야만 하냐고 가끔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어가며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책장을 넘길수록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위는 온통 봄날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한데, 혼자 먹구름을 가득 끌어안고 글을 쓰고 있다.

저자는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역사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소재한 헤브루대학에서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저자는 유대인의 역사와 홀로코스트를 꼼꼼하게 기술하였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을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일이 학습을 통해 가능하단 말인가? 홀로코스트가 불과 80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무섭기만 하다. 어떻게 유대인들은 온 세상의 멸시와 적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선민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토록 유럽인들에게 질투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니, 나와 다르면 경계를 하고 배척하는 민족주의 사상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잔인하고 혐오스러운지 역사를 통해 수없이 통해 수없이 행해진 대학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고 믿으며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자들, 그들을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홀로코스트를 과연 문학과 그림, 음악, 건축이 재현할 수 있을까? 이미 죽은 자들은 아무 말이 없는데, 살아남은 소수의 증언이 이들의 죽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 르완다 대학살,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이들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전쟁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피로 물들인 역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게슈타포를 피해 2년 동안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안네 프랑크, 끝내는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던 그녀는 쓰고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안 좋은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이 선하다고 믿고 있다.”

나는 가까스로 안네의 말을 붙잡고 서 있다. 인간 본질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선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으며, 그래서 지금까지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있다고 믿으며, 무고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무력해 보이는 두 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제국이 유럽의 유대인을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남기지 않고 멸종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노선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나치 국가에 경제적 혹은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이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 출신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유대인들만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집시들도 인종적으로 불순한 집단으로 여겨져 가스실로 보내졌으며, 러시아인, 폴란드인, 그리고 다른 독일 동유럽 점령지 주민들도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 설사 게르만족이라 해도 정신적 혹은 신체적 결함이 있다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 계몽주의, 프리메이슨운동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들은 부패의 인자로서 소요, 혼돈, 그리고 인종 타락을 부추긴다고 낙인찍혔다. 유럽인들이 유대인을 악마로 간주하는 이 사상에 감염되게 된 데이는, 그 연원이 중세로까지 거슬로 올라가는 아주 뿌리깊은 반유대주의적 기독교 전통이 크게 작용했다. 유대인은 고리대금업자, 불경스런 배신자, 제례살해범, 기독교에 반항하는 위험한 음모자, 또는 도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부류라는 이미지가 이미 확고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치가 그런 이미지를 스스로 고안해낼 필요는 없었다.(19)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이들을 무자비하게 몰살시키는 일은 SS(나치 친위대)의 총수 하인리히 히믈러와 그의 최측근 수하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맡았다.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는 실제로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내용만 바꾼 것으로, 어쩌면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끔 기묘하게 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택된 민족이 둘일 수는 없는 것이다. 히틀러가 구세주로 자임할 수 있으려면, 3000년 동안이나 선택된 민족으로 여겨졌던 바로 그 유대인이 사라져야 했다.(34)

   유대교의 핵심에는,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의 내면에 도덕률을 심어준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성서 속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나이 산에서 성스러운 율법과 십계명의 계시를 받음으로써, 신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 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이 독특한 윤리적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었다. 곧 인류는 창조주의 뜻에 따라 탄생되었으며, 그것은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각자 신이 내려준 생명을 이어가고,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이다.(35)

   1933년 1월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내세우고 파펜을 부수상으로 하는 보수주의자 8명 나치는 고작 2명만이 참여한 내각이 구성되었다.(85)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세워졌다. 이 법률은 독일인 및 그와 비슷한 혈통의 국민과 유대인 사이에 결혼이나 혼외정사를 금지시켰고, 유대인은 45세 이하의 독일 여성을 고용할 수 없도록 했다. 또 유대인이 국기를 걸거나 제국의 색깔을 사용하는 것도 금했다. 그리고 제국시민법은 누가 유대인이고 또 누가 유대인에 속하지 않는제를 새로 규정했다. 이 법에 따르면 유대인에게는 다음 세 범주가 있었다. 1. 완전한 유대인은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가운데 적어도 3명이 유대인일 경우에 해당되며, 또한 그 중 사람이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유대교를 믿고 있거나 나중에 믿게 된 사람, 혹은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도 이에 해당한다. 2. 혼혈 유대인 ‘제 1등급’은 친조부모 및 외조부모 가운데 두 사람이 유대인이지만, 유대인과 결혼하지 않았거나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켰다. 3. 혼혈 유대인 ‘제2등급’은 친조부모와 외조부모 가운데 한 사람만이 유대일 경우이다.(95)

   1938년 10월, 그 당시까지 독일에 거주하던 폴란드 출신 유대인 1만 7천명은 나치 당국에 의해 집단적으로 잔인하게 강제추방을 당했다. 악전고투 끝에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국경에 다다른 이들에게 폴란드 정부는 입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감자기 무국적자로 버림받은 이 폴란드 유대인들 중에 그린스즈핀 일가도 있었다. 이 가족 출신으로서 법과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책 파리에서 홀로 망명생활을 했던 17살 난 아들 헤르셀은 자기 부모와 유대인들 모두가 학대 받는 것에 분개했다. 그는 복수를 하기 위해 고민끝에 파리 주재 독일 3등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를 암살했다. 나치선전기관은 즉각 이 행위를 전쟁선포, 그리고 전세계적인 유대인 비밀결사 조직의 음모라고 규탄하고 나섰다.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서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전례없이 잔혹한 반유대주의적 폭력과 테러를 일제히 자행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들이 수없이 부서졌고 그 깨진 유리 조각들이 마치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이때의 사건을 듣기 좋게 일명 ‘수정의 밤’이라고 부른다.(107)

   나치정책은 분명히 수정의 밤을 계기로 과격화되었다. 독일 유대인들은 1939년까지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장된 사람들이었다. 3년 뒤에 이들은 부랑자 신분임을 확인시켜주는 노란 다윗별 문장을 모두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113) 게토는 1939년 말부터 폴란드 전역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바르샤바 게토로서, 한때는 그 수가 50만명까지 달할 정도로 그야말로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게토에 연구모임, 도서관, 그리고 지하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가난한 어린이들을 보살피고 키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활동을 제공하는 모임들도 생겨났다. 게토 거주자들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전통과 유대교의 종교적 가치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토라 경전이 보전되었고, 탈무드 연구, 기도, 성인식, 히브리어 학습이 계속되었다. (131)

   히틀러는 1945년 2월 13일 “장차 세계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나치는 진정으로 “유대인 종양을 절개했다”고 자랑했다. 히틀러는 자살하기 하루 전인 1945년 4월 29일 베를린 수상 관저에 소련군의 폭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정치적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일렀다. 히틀러의 최후 유언장은 대량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홀로코스트를 맨 처음으로 부인하는 문서였다. 그는 유대인과 벌인 전쟁을 “세계 모든 민족들을 독살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을 가스와 총으로 죽인 행위는 연합군이 독일에 퍼부은 공습에 비하면 ‘인간적인’ 대응이었고, 나치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공습행위는 ‘아리안족’에 대한 ‘유대인’의 침략행위였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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