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미메시스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상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좀머 씨 이야기> 표지를 기억하세요? 쥐스킨트 소설에 삽화그린 사람인데...라고 말하면 다들 아~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꼬마 니꼴라>도 유명하지만 말이다. 상뻬는 1932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그림을 그렸으며 1960년 르네 고시니를 알게 되어 함께 <꼬마 니꼴라>를 만들었다.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곧 그는 프랑스에서 데생의 일인자가 되었다.

   상뻬의 그림은 유쾌하다. 가느다란 선들이 촘촘히 채워져 있는 그림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컵 하나, 머리카락 하나 대충 그린 것이 없다. 특히 표정들은 얼마나 놀랍고 풍부한지. 게다가 곁들어진 글을 또 어찌나 멋진지. <얼굴 빨개지는 아이>(1969)에서 시도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꼬마 마르슬랭과 언제나 재채기를 하는 꼬마 르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그렇게 몇 마디 글과 그림으로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1995)의 주인공 라울 따뷔랭도 얼마나 아름답고 애처로운가. <뉴욕 스케치>(1989)는 냉철하면서도 예리하게 뉴요커들을 묘사하고 있어 씁쓸한 웃음과 함께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

   상뻬의 책들은 매우 얇고 글도 거의 없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다. 읽다보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웃음이 나고, 언젠간 다시 펼쳐보게 된다. <아름다운 날들> 역시 유머와 따뜻함이 가득하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말만 하는 소시민들이지만 상뻬는 그들을 향한 애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견제하고, 사랑에 빠지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림과 함께 곁들어지는 글은 또 얼마나 뛰어난지. 예를 들면, 공원에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모여 택견을 연습하고 있는 그림이 나온다. 무리와 떨어져 한 아주머니가 홀로 택견을 연습하고 있고, 그 모습을 두 명의 아주머니가 지켜보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림 아래엔 이런 글이 쓰여져 있다. “맞아요. 맞아. 분명해요. 내가 며칠 전부터 죽 봐왔다니까. 저 여자가 아주 천천히 되풀이하는 몸동작은 청소하는 모습이야. 저걸 잘 따라하면 굉장히 유용하겠어.” 상뻬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상뻬를 향한 무한 애정을 보내며 책을 덮는다.

 

# 좀 길어지긴 했지만 맛있는 점심이었네. 저 사람의 문화적 소양은 매력적으로 보이네만 그가 들려준 온갖 일화며 인용들은 5분이면 인터넷에서 모두 찾아낼 수 있어.

 

# 여보게 질베르, 내가 여자들 마음속에 깊은 동경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바로 내 시선 속의 깊은 절망을 미묘하게 표현해 낸(장담컨대 그런 표정을 지어내느라 무진 애를 썼지) 덕분이라네.

 

# 모기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잠. 어제 나눠 준 가방 안에 조난을 알리는 조명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겨우 보리 설탕과자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까지는 집단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음(오히려 이런 경험을 흥미로워했으니까). 한두 시간 좀 더 기다려 볼 것. 그런 다음 이 설탕과자를 가능한 한 멀리, 높이 던져 볼 것.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 우리가 어른이 되면 속옷을 입게 될 거야. 할 수 없지 뭐. 근데 영화나 텔레비젼에서 보니까 어른이 되면 내가 널 아주 비싼 식당에 초대해야 하더라. 그런 식당에서 먹는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먹는 거랑 거의 비슷해. 어쨌든 그렇게 해야만 어느 날엔가 네가 속옷을 벗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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