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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 장석주의 문장 예찬 : 동서고금 명문장의 치명적 유혹에 빠지다
장석주 지음, 송영방 그림 / 문학의문학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2009. 동화출판사 발행.
장석주 시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대추 한 알> 시 한 편 정도이다. 짧고 간결한 그의 시가 마음에 들어 수첩에 적어 놓았고 이름만 마음에 두었다. <마흔의 서재>는 서점에서 스르륵 훑어 보기만 했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는 목차를 보니 처음 보는 작가들이 있어 얼른 책을 펼쳐 들었다. 엘르아스 카네티, 김정국, 에크하르트 톨레, 막스 피카르트, 박용래, 에밀 시오랑, 박정만, 굴원, 미시마 유키오를 이 책을 통해 소개받았다. 감사하다.
책에서 소개 한 작가들의 문장들을 허겁지겁 삼켰다. 작가들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해 놓아 글을 이해하기가 좋았다. 국적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가들을 소개해 주어 좋았다. 책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그가 마음에 들었던 문장과 내가 골랐던 문장이 다른 것을 볼 때 그 다름이 좋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한 작가와 다른 작가를 굴비 엮듯이 스윽스윽 연결 지어가는 문체가 좋았다. 책에 적혀있는 수많은 시들이 좋았다. 지칠 줄 모르는 작가들의 독서에 대한 열정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침묵과 소박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한권의 책 안에서 또 다른 좋은 책들을 발견할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다.
# 한줄의 시를 쓰려면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길, 뜻밖의 만남,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 이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 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기분을 언짢게 해드린 부모님들.....-릴케 <말테의 수기> 인용-
# 시를 쓰려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죽음을 알아야 하고, 죽음에 대한 충분한 숙고를 해야 한다.
#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용
#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인용
# 살아남음의 순간은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보고 느끼는 공포감은 이내 죽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으로 변한다. 죽은 자가 누워 있다면 살아남은 자는 서 있다. 그것은 마치 조금 전의 싸움이 일어나서 누군가가 죽은 자를 쓰러뜨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살아남음에서 개개의 인간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적이다. 그리고 이런 본질적인 승리에 견주어본 때 모든 슬픔은 하찮은 것이다. -엘리아스 카네티 <살아남은 자> 인용.
#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八餘)라고 했네. -김정국 <사재> 인용
# 모든 가치 있는 말들은 그 침묵에서 흘러나온다. 침묵은 말들이 태어나는 자궁이다. 침묵은 자궁을 가졌으니 말들을 낳는 어머니이다.
# 하이쿠는 최소한의 언어만을 남긴다.
‘홍시여, 젊었을 때는 너도 무척 떫었지-소세키-’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 -바쇼-’
이런 하이쿠를 읽을 때 텅 빈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한 줄의 시에서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이렇듯 하이쿠는 찰나의 언어이다. 찰나를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위에 숨은 영원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