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7 : 반물질의 블루스 ㅣ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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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미키7의 후속작!! 예전에 샀던 황금가지 소설 사이에 끼어있던 리플릿에 미키7의 후속작이 발매 예정이라고 적혀있길래 언제 나오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 책 받자마자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테세우스의 배'에 비유한 익스펜더블 설정, 당장 3초 뒤에 목이 따이게 생겼지만 빈정거리는 걸 못 참는 캐릭터들 덕분에 흥미진진했던 미키7... 하지만 당시에 내가 써놓은 기록을 보니 뒤쪽으로 100페이지쯤 더 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소리가 적혀 있었는데, <미키7:반물질의 블루스>는 말하자면 그 아쉬운 100페이지를 충분히 채워주는 후속작이다.

절대로 복제품은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즉 앞으로 유일한 미키7 반스로 남게 되면서 마무리된 <미키7>을 정면으로 비웃기라도 하듯 <반물질의 블루스>는 "방금 복도에서 날 봤어."라는 말로 시작한다. 심지어 미키는 별안간 토끼 돌보미(정확히는 토끼 돌보미의 보조) 신세가 되어 있다. 본인은 그럭저럭 만족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미키 덕분에 위기를 극복은 했지만 개척민들은 또 다른 의미의 위기에 놓여 있고,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사령관 마샬은 미키에게 숨겨두었던 반물질 폭탄을 다시 회수해오기를 명령한다. 사실상 죽으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명령을 등에 짊어지고, 미키는 또 다시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러 떠난다.

그럭저럭 친구...아니, 친구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처럼 보자마자 무기를 발사하지는 않는 관계 정도로 발전한 크리퍼들. 그리고 미키 일행은 그 사이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최근에 우리 둥지를 침범한 생명체에게 말하는 스피커'지만 자신을 '스피커'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하는, 베르토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어떤 크리퍼와 만나게 된다. 그는 미키에게 꽤 우호적이다. 어쩌면 반물질 폭탄을 돌려줄 것도 같다. 하지만 그는 미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게 된다. 이 땅에는 자신들 외에 또 다른 외계생명체 집단이 있고, 그 폭탄은 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여기 도덕적 딜레마를 하나 준비했다. 살아있는 적과의 약속일까, 아니면 죽은 친구와의 약속일까? 이 중 어느 것을 우선시 해야 할까? - 368p

사실상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굵직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작과 후속작 내내, 미키는 계속해서 안전(미시적인 의미로도, 인류 전체 측면이라는 거시적인 의미로도)과 눈 앞의 동료, 사랑, 친구 사이의 저울질을 강요받아왔다. 미키는 후자를 놓지 못해 매번 쩔쩔매며 선택을 유보하는데, 운 좋게도 거의 늘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은 채 살아올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육체만 빼면)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미키는 '선택'을 해야 한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는, 낭만적이지만 우유부단한 그런 대답으로는 상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

사실 답이 거의 정해져있는 도덕적 딜레마나 마찬가지지만^^;; 물론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는가인데, 여기에서 미키는 정말이지 모두를 나자빠지게 만들 만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미키7>을 읽었을 때와 비슷하게 '아~ 뒤쪽의 클라이막스 이야기가 한 50페이지만 더 있었으면 그래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ㅠㅠ'라는 생각이 조금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개척민과 토착민,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토착민 사이의 이야기... 스스로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비유하는 미키 반스의 정체성 탐구라든가 개척민과 토착민 사이의 갈등 등, 이야기가 담고 있는 철학적인 사유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전편만큼 많지 않은 것 같지만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스펙타클한 재미는 더 풍성해졌다는 느낌이다. <미키7>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안 읽고 흘려보내기에는너무 아쉬운 후속작임.... 이게 봉준호 감독의 영화화에는 포함되지 않는 후속작인 게 아까울 정도!!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최근에 우리 둥지를 침범한 생명체에게 말하는 스피커‘지만 ‘스피커‘라고 불러도 돼. 드디어 만났네. 반가워, 미키." - P150

나샤는 내가 등을 대고 쓰러질 정도로 세게 주먹질을 했다. "이 바보 같으니. 그건 알고 있지, 그렇지?"
나는 나샤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여 내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댔다. "그럴지도. 하지만 이 바보는 너의 바보잖아."
나샤가 우리의 호흡기를 들어올리고 내게 키스를 했다.
"나의 바보지." 그녀가 말했다. 정말 완전 나의 바보야." - P342

여기 도덕적 딜레마를 하나 준비했다. 살아있는 적과의 약속일까, 아니면 죽은 친구와의 약속일까? 이 중 어느 것을 우선시 해야 할까? - P368

"혹은 미세 수슬을 하는 방법도 있다네. 확실히 그게 가장 공격적인 접근이지. 완전히 회복하거나 사망하거나 둘 중 하나야. 위험이 크면 보상도 큰 법이니가, 안그래?" (중략)
나샤는 뭘 원할까?
당연히 나는 이 문제의 답도 알고 있다.
나샤라면 공격적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대답해버렸을 것이다.
나샤는 예전과 똑같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나샤는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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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
캐런 조이 파울러 지음, 서창렬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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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에서 좋은 기회를 주어서 함께하게 된 벽돌책 챌린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설령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링컨 대통령 암살범'이라는 존재로는 인지하고 있는 존 윌크스 부스...가 아닌! 그의 형제자매와 어머니와 아버지...즉 부스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600페이지짜리 책이라 출퇴근하면서 읽기가 쉽진 않았지만 결국 해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괴물일 때, 그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표지의 문장처럼 작가는 결코 존 윌크스 부스를 옹호하거나 쉬운 방식으로 연민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의 행적이나 심리를 깊게 다루지도 않는다.


화석을 발굴하려면 화석 그 자체가 아닌 주변의 흙을 파내야 하듯, 작가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존 윌크스 부스에 주목하는 대신 대통령 살인범을 가족으로 갖게 된 또 다른 부스들에게 주목한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형제를 걱정하는 그들을 통해 존 윌크스 부스 또한 알게 된다.

확실히 존 부스는 과격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가족들 사이에서 유별나게 남부의 편을 드는 사람이고, '정당방위'를 핑계로 내세우며 아무렇지 않게 총을 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엄청난 악마인가 하면 딱히 그렇지 않다. 노예폐지론을 두고 마을이, 주가, 국가가 대립하는 격동의 시대였기에 존 정도로 피가 들끓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는 누이들의 말을 수용하는 것 같은, 적어도 그녀들을 안심시키는 말 한 마디를 건넬 줄 아는 존이 그들에 비해 특출나게 더 못됐거나 폭력적인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래서 결국 연극 도중 링컨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존 윌크스 부스이다.

링컨이 살해당하는 장면은 꽤 건조하다. 여기에서 소설이 마무리됐더라면 아마 나도 이 소설을 영원히 '링컨을 살해한 테러리스트 존 윌크스 부스'와 그의 부수적인 가족들 이야기로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평이한 결말을 그리는 대신 뒤에 강제로 남겨져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부스 사람들에게 한 파트를 더 할애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 한다. 심지어 로절리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적어도 (대통령과 북부를 싫어했던) 존은 좋아하겠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 생각은 바로 뒤에 이어진 "존 윌크스 부스가 체포되었습니다." 하는 신문팔이 소년의 외침에 깨어지지만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가족이 미국 최고의 악당이라는 사실에 부정도 했다가, 침묵도 했다가, 괴로워도 한다. 심지어는 로절리는 자신이 존을 정말 알았던 적이 있는지조차 의심한다. 누군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살인자 존은 그녀가 아는 세계 안에는 없었다. 상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은 후에도, 그들은 아무 때고 존을 떠올린다. 존을 사랑하는 것은 금지된 행위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작가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것은 아무도,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도 막을 수 없다. 에드윈의 말처럼, 그들이 '형제'이기 때문이리라.

준이 대통령 살해범의 형이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데도 그를 잡으러온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를 숨겨주는 호텔 직원들을 보고 있자면, 동시에 '부스 가문'이 얼마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실감할 수 있어 오묘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사람들의 그토록 격렬한 반응은 사랑에 대한 배신감이 더해진 반응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배우의 길을 택한 준, 에드윈, 존이 결코 '부스'라는 성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처럼 (심지어는 배우가 아닌 에이시아조차 자신의 결혼에 부스라는 이름이 크게 작용했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 살해범 존 윌크스 부스가 자신의 형제라는 사실을 영원히 떨쳐낼 수 없다. 이것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도, 부정한다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핏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영광과 불명예가 부스라는 이름과 영원히 함께 가는 셈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소설이지만 흡입력이 대단해서 금방 읽었다. 이야기 자체도 몹시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후기에 남아있는 작가의 말-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남부 연합의 깃발을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마지막이기를 염원한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비록 작가가 책을 저술하는 동안엔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책을 읽는 현재에는에는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가사를 담은 메릴랜드의 주가가 폐기되었다는 사실이 작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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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 지음, 서진석 옮김 / 양철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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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은 승리한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한다.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극한의 추위도 불사하고 위험천만하게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나들었다. 이 아이들은 늑대의 아이들(Wolfskinder)라고 불렸다.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늑대의 아이들'의 행적을 좇는 일종의 글로 쓰인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이야기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엔 소위 말하는 기승전결의 굴곡이 없다. 모두가 납득할만한 드라마틱한 장면도, 행복하거나 슬픈 결말도 없다. 어른들은 갑자기 죽고, 아이들은 갑자기 뿔뿔이 흩어지고, 가족들은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집에서 내쫓긴다.
마지막도 그렇다. 어떤 이름 모를 선생과 관현악장에게 구해진 레나테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될지, 아니면 또 다시 약간의 선의만 받은 채 다른 어딘가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일견 미완성처럼 느껴지는 이 결말은 이것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임을 오히려 담담하게 증명한다. 그들의 인생이 그런 식으로 흘러갔으므로.

온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군인들의 폭력은 끝이 없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레나테 가족을 집에서 내쫓았고, 그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폭력을 휘두른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구해보고자 국경을 넘어보지만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매몰차기는 매한가지다. 이따금 그들을 딱하게 여겨 한끼 식사나 잠자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처지라 동프로이센 아이들을 상대로 영원히 자선활동을 할 순 없다.

하지만 매정하게 레나테의 눈 앞에서 문을 닫았다가도 잠시 뒤 울며 뛰어나와 그녀의 손에 먹을 것을 들려주는 의사나, 그렇게 레나테를 '독일 년'이라고 부르며 조롱하고 괴롭혔지만 급박한 순간에 오히려 나서서 '쟤 이름은 마리톄입니다. 내가 아는 앱니다.'라고 그녀를 감싸주는 미키타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그렇게 매몰차고 차갑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매몰차 보이는 사람의 마음에도 결국은 사랑이 남아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아이들이 혹독한 추위와 기근에 내몰렸지만 결국 그 아이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한 명이라도 더 끌어올린 것도 마찬가지로 같은 인간인 것이다.

원래 리투아니아어판 제목은 <내 이름은 마리톄>라고 한다. 레나테가 리투아니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독일 이름을 버리고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바로 그 문장이다. 이야기 속에서 이 문장을 믿는 어른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그녀를 윽박지르고 조롱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문장의 함의를 이해하고 모른 척 해준다. 그 온정이 레나테를 마지막까지 움직이게 만든다.

실화 기반인 것은 서평단을 신청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지간한 각오로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비극적인 이야기라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절망적인 순간에 조금씩 조금씩 레나테를 향해 뻗어지는 도움의 손길들을 보고 있자니 '늑대의 아이들'에게도 세상이 그렇게까지 전부 매몰차지만은 않았겠구나 싶기도 하고...

특히 레나테의 정체를 알면서도 입을 다물어주는 미키타를 보면서는 얼마 전에 다시본 영화 <더원더>의, 립 부인이 애나를 빼돌린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주는 미카엘 수녀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더 이상 아이들이 그런 고통을 겪게 해선 안 된다는 번역가의 후기가 가슴 속에 오래 남는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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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나이 ㅣ 환상문학전집 38
안드루스 키비래흐크 지음, 서진석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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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소설이라니...책 소개를 보자마자 구글 지도를 켜고 에스토니아부터 검색해보았다. 동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라트비아, 그리고 북서로는 발트해를 끼고 핀란드가 있는 나라. 황금가지에서 좋은 기회를 주신 덕분에 이 낯선 미지의 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다는 판타지 베스트셀러를 펼쳐볼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는 살아있는 것을 만나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담담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어떤 친구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화자가 소개하는 '뱀의 말'은 무척 신비로운 마법의 언어처럼 들린다. 동물을 앉은 자리에서 죽게 만드는 말이라니, 다소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때 뱀의 말을 잊지 않은 엘크 하나가 화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지고...화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땐 나도 모르게 판타지 활극을 기대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마을로 거처를 옮기고, 숲에 남은 유일한 남자아이인 화자는 조금은 외롭고, 또 조금은 삐닥한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한다. 화자는 삼촌에게 '뱀의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그 전까지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던 화자의 세계가 갑자기 물감을 뿌린 듯 다채로워진다. 점점 머리가 굵어진 화자는 숲 밖의 세계-마을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레메트의 세계는 그렇게 점점 확장되어 간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눈에 뱀의 말을 하며 짐승과 어울리는 숲의 사람들은 야만인으로 보일 뿐이고, 숲의 사람들 눈에 마을 사람들은 뱀의 말도, 사냥하는 법도 잊은 채 미련한 노동을 되풀이하는 바보들로 보일 뿐이다. 독자는 자연스레 화자-레메트가 이 두 집단을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되주리라 기대하지만 레메트의 앞에 도사리고 있는 운명은 그저 혹독하고 잔인하다.

<뱀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나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환상소설이다. 서사의 방향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톤도 그렇다. 이 이야기는 쿨하고 멋진 판타지 액션 활극이 아니다. 피도 튀고 사람도 짐승도 죽긴 하지만 액션 활극이 아닌 느리고 거대한 장례식에 가깝다.

혈기왕성한 소년 레메트는 줄곧 '뱀의 말'을 할 줄 아는 이가 늘어나 북녘개구리를 깨울 수 있기를, 그래서 북녘개구리가 철갑인간과 마을사람들을 다 잡아먹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그는 유일한, 최후의 뱀의 말을 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는 더 이상 북녘개구리를 깨우려고 하지도 않고, 북녘개구리가 사람들을 다 잡아먹길 원하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면 퍼뜩 맨 앞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허겁지겁 첫 장을 펼쳐보면 아리송하게만 느껴졌던 이야기가 사실은 몹시도 쓸쓸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다. 전통, 새로운 것, 소통과 화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소설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편안히 눈을 감게 될 것이다. 내 꿈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평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북녘개구리 그리고 뱀의 말을 하는 최후의 인간. 바로 우리 둘 말이다. - 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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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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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지에 이어 도착한 <화성과나> 정식출간본👏👏👏👏👏👏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표지인데, 홀로그램처리된 사선이 추락하는 무언가 같기도 하고, 특이하게 생긴 비행물체 같기도 하고...묘하게 편안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지였다.

특별히 목적이 없으면 작가와 편집자가 고심하여 배치했을 순서대로 읽는 편인데, 개인적으로 무크지의 인터뷰를 읽을 때부터 <위대한 밥도둑>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원칙을 깨고 <위대한 밥도둑>부터 읽었다. 이건 정말 한국인이라 할 수 있는 발상의 한국적인 SF소설이 아닐까? '밥을 먹는다'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문장 속에 함의된 뜻을 재치있게 녹여낸 단편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책을 읽었는데도 이사이의 간장게장 웅변을 읽고 나니 괜히 나도 간장게장이 먹고 싶어진 게 흠이라면 흠...ㅎㅎ 어딘가에 정착해 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 의식주의 조건을 따지자면 저 한참 아래...아니 아예 리스트에도 없을 무언가를 꿈꾸고 소망하는 것. 그게 인간의 '살아감'이 아닐까. 줄 수 없다고 말할 순 있지만 말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행성봉쇄령>은 사실 별로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의외로 취향저격이었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보았던 스웨덴 SF영화인 <아니아라>가 생각나는 소설이었는데, 영화의 우울한 엔딩과는 달리 이 소설은 꽤 희망차고 귀엽기까지하다. 우주 방식의 Love wins라는 느낌!

<화성과 나>에 실려있는 여섯 개의 단편은 전부 화성 정착 초기의 모습(그게 화성 쪽이든 지구 쪽이든 혹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우주선이든)을 담고 있다. 하지만 보통 SF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희망찬 모습도, 혹은 절망만이 가득찬 비참한 모습도 없다. 배명훈이 그리는 화성 정착 초기의 풍경은 마치 의지 가득한 사람들의 무모한 귀농 도전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농사 지으러 간 조안도 있긴 하지만) 엉망진창이고, 제대로 되는 건 반...어쩌면 그 이하밖에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돌아가고 있으며 어쨌든 앞으로 잘 되기를 바란다는.

인간과 우주와 음식(식량 아니고 밥!)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단편집이었다. 아무래도 단편집이다보니 대체로 어렴풋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끝나는 것이 조금 아쉬웠는데, 작가님이 이번 책을 집필하면서 쌓은 화성에 대한 사랑과 지식으로...좀 더 긴 장편을 써주시면 행복할 것 같다는 지극히 사적인...욕심을....내본다...ㅎㅎ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여기서는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우리는 이미 다 끝장난 게 아닌가, 하고 지요는 생각했다. - P10

어떤 무신경은 무신경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마음에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지요는 부고에 답하지 않는다. 애도는 하지만 표현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애도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어도, 심지어 동생이어도. - P11

지구를 떠나기 전에 은행 대출을 다 정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인의 죽음에 더는 마음의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파산할 만큼 빚이 늘어가는데 지불 수단이 하나도 안 남아 있었다. 동생이라는 빚은 화성에서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다. - P11

살인 사건은 매끈하게 봉합되어 있던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 P28

지요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던 광물학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기묘한 장면 속에는 좁은 곳에서 살아가는 화성 사람들의 운명이 담겨 있었다. - P34

"다음 날 아침에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발견되는 것. 이 행성에서는 그게 사건이야. 여기는 차가운 지옥이지만 우리는 매일 그 사건을 일으키고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공동체의 모든 자원을 다 쏟아부어서 아침마다 일으키는 기적이지." - P40

이사이는 화성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반지로 만들어서 손에 끼면 얼마나 예쁠까. 물론 그 반지 위의 삶은 고달팠다. 춥고 위험하고 황량하고 쓸쓸했다. 심지어 자유롭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화성은 아직 원시 문명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이사이는 그 행성을 사랑했다. 다른 많은 화성인들과 마찬가지로. - P99

"그러니까 좀 포기하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계속 원하고 싶은 걸 원할 거예요! 줄 수 없으면 줄 수 없다고 해도 좋지만, 원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아무한테도 없잖아요. 그냥 이게 화성의 삶이라고요!" - P129

"아직 아무에게도 그 소식을 전하지 말게. 저 두 사람이 사이클러 탑승자의 임무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자고. 우리는 미사일 같은 게 없지만, 저 일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우리가 이기고 있는 거거든."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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