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가(내가??) 사랑한 소설들 - 다 읽고서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리뷰를 3편에 나누어 썼습니다.

 

여기에는 그 리뷰 1편만 옮기고. 나머지는 아래 블로그로 대신합니다.

 

https://blog.naver.com/naamoo65/220227994450

 

https://blog.naver.com/naamoo65/220231852754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아주 깊이 탐독했으나, 그 지식의 깊이에

십분의 일도 미치지 못한 듯한 절망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리뷰는 열심히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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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을 읽으면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또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학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두 남자!

침묵 안에서도 대화가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이 두 남자의 침묵이 매우 수줍어 보입니다.

 

 

방대한 독서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지적이고 철학적인, 때로는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유쾌한 수다가

우리 독자에게도 유쾌하게 수용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독서가 바탕이 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십 대 이후, 교양과 철학에 대한 독서량이 제로베이스가 되어버린 나는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뇌가 과호흡을 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1.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이 작가의 <<노르웨이 숲>>을 두 번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해변의 카프카>>도 읽은 듯 한데...

아무리 심장 떨리는 밤으로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라도,

이제는 다시 책을 펼치지 않으면...

기억 저편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생각만이 지배적으로 나를 괴롭힙니다.

다시 꼭 읽어봐야 할텐데... 할텐데...

그런데 어찌, 책 읽기가 세월이 흐를수록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과제처럼, 중압감을 주고 있습니다. ㅠㅠ

 

밑줄 긋기 ... 288-289

 

이동진 ;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텍스트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것이 영화 <설국열차>예요. 제가 보기에 <설국열차>는 이야기로 본다면 완벽한 그릇을 만드려고 하는 영화예요. 그래서 영화 속에서 굉장히 듬성듬성해 보이는 것들도 알고 보면 봉준호라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창작자는 나름대로의 완벽한 배경과 설정을 갖고 있어요. 다만 영화에서는 그게 쉽사리 보이지 않았을 뿐이구요. 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말하자면 하루키의 텍스트를 만드는 방법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 그물 짜기의 방식이 하루키의 소설을 매우 문학적이고 매혹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중혁 ;  제가 말한 '문학적인 모호함'이란 표현도 결국 비슷한 이야기겠죠. 덧붙이자면 하루키의 <<다자키 쓰쿠루>>는 어떤 면으로는 메타 소솔로 읽힐 수도 있겠더라구요.

 

이동진 ;  맞아요. 그런 부분들이 있었어요.

 

김중혁 우리가 이야기를 접하는 방식 그리고 어떤 창작품을 대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관한 작품으로도 읽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무엇이 중요할까를 생각해보게 되는거죠. 아까 말씀하신 것에서 가져오자면, 누군가가 그릇 또는 그물을 건네 주었다고 해보죠. 받는 당시에는 그게 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건네준 그 그물이 무엇이었을까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그 이해가 더 커지고 깊어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게 문학인 것이고요. 하루키의 이번 작품도 처음에는 '이게 뭐야?' 했다가 그걸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그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모든 걸 다 활용해야 해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자기의 생각, 누군가의 충고, 자기의 경험 등을 끌어내서 ', 이런 이야기일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게 자신만의 답이 되는 거잖아요. 그게 풍성하면 풍성할수록 좋은 이야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재미있게 보았지만 <설국열차><<다자키 쓰쿠루>>, 저는 시간이 좀 지나니까 더욱더 굉장히 좋은 이야기구나,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구나 깨닫게 되더라고요.

 

이동진 ;  그렇습니다. 좀 다르게 설명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한정된 질량을 가진 재료를 이용해 어떤 내용물을 담아낸다고 가정해봐요. 같은 양의 그 재료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 경우와 그물을 만들 경우를 비교할 때 그 형태를 고려해보면, 그물을 만드는 경우에 훨씬 더 넓게 짤 수 있을 거예요. 반면에 같은 양의 재료로 그릇은 물샐 틈 없이 촘촘하지만 그 대신에 훨씬 적은 면적으로 빚어야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개입을 허용하고 초청하거나 소환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점에서 하루키 소설이 매력적이지 않나 생각해봐요.

 

김중혁 ;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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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만든 그물' 에 대한 두 사람의 문학적이면서도 영화적인

비유를 바탕으로 하는 진지한 대화를 이해하기에는

내 지적 용량과 배경 지식이 너무나 턱없이 부족해서

겨우 몇 마디도 내것으로 소화를 하지 못하고, 지금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습니다. ㅠㅠ

빨리 가벼운 소화제라도 먹고 와야겠습니다. ^^

 

2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책도 언제 읽었었는지 가물가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상남자 '조르바'를 잊은 듯, 잊은 않은 것 같은... 이런 기억의

정체는 과연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밑줄 긋기 ... 260-262

 

이동진 ;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일종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 소설의 초반이 참 좋은데요. 일단 ''는 친구를 떠나보냈어요. 친구뿐만 아니라 한 시절과도 이별하게 되었죠. 그 가버린 시절에 대해서 자신이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는 한편 어딘가로 떠나서 새롭게 무언가를 해보려는 때예요.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인물이 다가옵니다. 그 새로운 인물과 관계를 맺고 여러 사건을 겪다가 불쑥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이것이 성장소설의 대표적인 이야기 얼개잖아요.

 

김중혁 ;  맞아요. 중간에 이런 부분이 있어요.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고 서른다섯이라고 하니까 이렇게 말해요. "서른다섯이나 되어서 그런 소리를 할 정도면 대가리가 제대로 여물긴 글렀구나." 그러니까 서른다섯 먹은 주인공 ''의 대가리가 여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장소설의 성격이 있죠.

 

이동진 ;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조르바가 "날 데려가시겠소?"라고 물어요. 이때 "그럼요"라고 응하면 이상하죠. 그 대신 ''"왜요?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요?"라고 묻습니다. 여기에 조르바가 한다는 말이 "당신이 들어보지도 못한 수프, 생각해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압니다"라는 거죠. 저는 이 소설이 먹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조르바를 만나기 전에 주인공은 먹는 것을 꺼리거나 죄악시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육체는 우리 영혼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뻘밭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말하자면 육체를 부정하는 플라톤주의자 같은 사람이었거든요. 그야말로 '핏기 없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는데 조르바를 만나면서 달라졌죠. 지금 말씀드린 '수프'로 상징되는 음식이나 먹는 행위, 또는 과부와의 하룻밤으로 상징되는 육체적인 쾌락에 대해 눈을 뜨고 경험하게 되는 거에요. 이를 통해 스스로를 잡아 두었던 수많은 이상과 당위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를 쟁취하는 이야기가 된 거죠. 저는 이런 부분이 잘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해요.

 

김중혁 ;  뒤에 다시 그 만남이 언급되죠. 조르바한테 그때 내가 수프를 먹고 싶은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까 조르바가 "뭐 딱 보아하니 펜대 좀 굴릴 줄 알고" 이렇게 대답해요. 육체를 숭상하지는 않지만 육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저도 참 좋았지요. 스스로 무지렁이라고 부르는 조르바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 균형을 잡아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동진 ;  . 조르바는 결국 서서 죽는 사람이잖아요.

 

김중혁 ; 마지막 장면에서 조르바가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가잖아요. 저는 이 사람이 뛰어내리면서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 하고 덜컥 겁이 났어요.

 

이동진 ;  그러네요. 날개가 돋아서 훨훨 비상할 것 같은 사람이기도 하죠. 저는 이번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으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톨스토이와 비슷한 소설가구나 생각했어요. 톨스토이는 소설 못지않게 사상, 현실과의 접목을 중요시했던 사람이었죠. 그 역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었구요. 그런 면에서 비슷하기도 해요.

 

김중혁 . 저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중간에 이런 부분이 특히 그랬는데요, 주인공 ''가 나비가 부화하려는 순간을 지켜봐요.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입김을 불어넣어줬는데 그 따뜻한 기운 때문에 나비가 부화하려다가 말라 비틀어져 죽게 되고 그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껴요. 그러니까 모든 것에는 변화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데 조급함 때문에 인위적으로 시간을 당기려고 하면 그 존재를 망가뜨릴 수 있구나 깨닫는 거죠. 조르바의 시간, ''의 시간 그리고 그 둘이 만나서 서로 변화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마 카잔차키스가 심취한 베르그송의 철학과 그 맥이 닿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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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는 '조르바'라는 인물은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으로의 자유'를 가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라는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무엇으로의 자유'를 가지고 삶에 대한 자유를 추구하는 '조르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조르바'는 어떤 사람일까요?

유쾌하면서도 단순 명쾌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조금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요.

소극적이고 머뭇거리는 뭔가 주저주저하며 소심함을 드러내는 스타일,

하지만 내면은 정서적으로 충만한 그런 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는 못난이로 그려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현실에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 훨씬 많겠지요!

그래서,

 '조르바'는 소설 속의 캐릭터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는 걸로!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읽을 책으로, <<지와 사랑>>(헤르만 헤세)를 추천합니다.

오늘 유난히, <<지와 사랑>>'나르치스''골드문트'

다시 만나보고 싶습니다.

 

p.s.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리뷰 2, 3편도 따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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