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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평점 :
주디스 헌은 이사한 하숙집에서 자신을 피하지 않고 대화를 나눈 상대인 집주인의 오빠 매든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와의 미래를 공상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매든이 한쪽 다리를 절고 그에게 술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매든 또한 주디스가 착용한 장신구만 보고 그를 부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게 할 생각에 주디스의 금색 손목시계가 멈췄다는 걸 모른다. 주디스는 매든이 자신에게 친절했던 이유를 알게 되고 상심해 6개월간의 금주를 깨고 다시 술을 마신다.
빨강 머리 앤의 앤도 주디스처럼 공상을 즐기지만 왜 주디스의 공상은 앤처럼 귀엽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까.
주디스는 외로움보다 엄청난 고통을 원할 정도로 누군가를 원한다. 그러나 그에겐 아무도 없다. 나는 주디스가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고 비웃는 걸 모른척할 만큼 외로웠던 거다.
_P.205
한 잔 마시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술은 망각을 돕는 게 아니라 기억을 도왔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불쾌한 사실들을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패턴으로 재정리해 주었다. 알코올 중독자. 주디스는 위험하고 실망스러운 순간을 떨치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이 모든 시련을 좀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더욱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해서였다. 이성을 거절하는 각성제의 힘을 빌려서.
_P.266
“당신 일이라고요? 그럼 저는요. 매든 씨? 제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당신이 절 대접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어떤 기대감을 주고, 제가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러고는 지금은 그냥 무시해 버렸고요. 전 겸손하게 당신을 쫓아다녔는데, 당신은 뻔뻔하게도 제게 사업상 구애를 한 거였군요. 제가 당신의 그 바보 같은 식당에 돈을 좀 투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요.“
_P.393
“당신에게는 남은 희망이 없어요, 모이라. 그럼 당신도 나처럼 되는 거예요. 대낮에 망상이나 하면서 그 꿈을 붙잡고 싶어 하는 거죠. 하지만 붙잡을 수 없어요. 그래서 술을 마셔요. 그 망상을 실현해 주는 힘을 얻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모이라, 그 인간이 실제로는 어떤 인간이건 간에, 그는 당신한테 상냥한 말을 건네는 왕자님이 돼요. 왕자님. 설령 그 왕자님이 늙고 못생기고 흔해 빠진 사람일지라도요. 그 남자가 가장 자랑할 만한 경력이 뉴욕 어느 호텔의 도어맨이라고 해도 상관없게 돼요. 이제 내 말이 실감이 돼요? 믿을 수 있겠어요?”
_P.412
그럼 이제, 난 어떻게 될까. 한 해 한 해 방구석에서 늙어갈까. 사람들이 날 구빈원으로 데려갈 때까지. 수녀들이 운영하는 집구석에 처박혀 우물우물 중얼대는, 사람들에게서 잊힌 노파. 주님, 이 도시에 홀로 남은 저는 어떻게 되나요? 제 옆에 남는 건 술뿐일까요? 술은 지긋지긋해요. 술은 쓸쓸해요. 술은 저를 무디게 했다가 결국 부끄럽게 만들어요. 저를 더 외롭게 하고 더 경멸받도록 만들어 버려요. 대체 왜 제게 이런 십자가를 주셨죠? 차라리 다른 걸 주세요. 엄청난 고통, 진짜 몹쓸 병, 어떤 것이든 주세요. 하지만 누군가가 함께하게…… 그 고통, 그 병을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제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어째서 그렇게 작은 감실 뒤에 조용히 숨어서 절 괴롭히시나요?
✦ 을유문화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