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위의 만찬
이용재 지음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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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영화 에세이라 생각하고 읽었다가 당황했다. 이 책은 요리 에세이였다! 저자는 음식 평론가이자 나도 아는 유명한 『실버 스푼』의 번역가다. 그래서 영화에서 제대로 고증하지 못한 음식을 비판한다. 이렇게 영화를 볼 수도 있구나 새로운 시선이 재밌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 다룬 영화 대부분을 재밌게 보지도 않았다. 흔히 알탕 영화라 부르는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까고 봉준호도 까고 박찬욱도 깐다. 시니컬한 에세이 좋아하는데 오랜만에 취향을 저격당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에세이에 영화에 등장한 음식 사진이 하나도 없다. 저작권 때문인가.

P.121
〈기생충>의 전전 작품인 <설국열차〉까지 되돌아가 살펴보자. 영화 속 음식으로 꼬리 칸 사람들의 바퀴벌레 단백질 블록이 가장 큰 관심을 끌었지만 내가 진짜 흥미를 느꼈던 대상은 따로 있으니, 절정에서 열차의 창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먹는 스테이크였다. 계급을 반영해 길고 긴 열차의 맨 앞칸에 앉아 편안히 즐기는 스테이크가 어찌 저렇게 맛도 보잘것도 없어 보일까? 〈설국열차>라는 실질적인 국가의 왕이 먹는 식사치고 너무 질박한 동시에 서양인이 즐길 만한 양태 또한 전혀 아니었다. 서울 강남의 중급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가성비 좋기로 입소문난, 하지만 실제로는 초라한 스테이크의 몰골이랄까? 우리 눈에는 괜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서양, 특히 상류층에게 어울릴 설정은 전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이 빈약하고 맛없어 보이는 스테이크 탓에 영화의 절정에 몰입하는 데 실패했다. 맨 앞 칸을 독차지하고 앉아 어린아이를 열차의 부속품으로 착취하고 학대하는 무자비하고 전능한 창조자가 먹기에 스테이크는 일단 너무 얇아 철저히 불합격이었다.
P.143
원래 이렇게 시커먼, 한국 호모 소셜 범죄 영화는 잘 안 보는데 트위터에서 몇 년 동안 이야기를 듣다 보니 거의 세뇌가 되어 결국은 찾아보게 되었다. 본 걸 후회는 하지 않지만 즐거웠느냐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헤테로 남자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들에겐 지겨운 구석이 있어서 아무래도 즐겁게 보기가 어렵다.
P.248
그렇게 세 여자에 자신이 보살펴 준 옛 애인의 눈앞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제임스까지 연결지으며, 영화는 여성의 행복에 남성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굳이 〈디 아워스>까지 보지 않더라도 나의 생각 또한 그렇다.
P.329
대략 2010년으로 접어들면서 케이크들이 조금씩 기존의 전통과의 문법을 파괴하기 시작해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처참하다 못해 기립박수를 치고 싶어진다. 앤티크의 진열장을 채우고 있었던 케이크들이 차라리 양반처럼 보일 지경이다. 굿 잡, 진심으로 굿 잡이다. 이제 우리는 케이크 지옥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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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메모리엄 - 2024 올해의 영국 도서상 데뷔 소설 부문 수상
앨리스 윈 지음, 이나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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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삽질을... 너네 서로 사랑한다고. 타인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면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말로 내뱉으면 통할 것들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웠다. 엘우드가 자주 인용하는 인 메모리엄을 찾아보고 둘 중 한 명이 죽고 남겨진 사람은 죽은 이를 평생 그리워하겠지 예상했지만 다행히 그들은 살아남는다. 육체와 정신은 전쟁으로 모두 망가졌지만. 엘우드보다 곤트가 이 사랑에 더 자신 없고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재회 후 단호하게 사랑을 맹세하는 모습은 그의 사랑을 눈치챈 친구들과 여동생 모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P.29
소년들이 어둠 속에서 하는 행동은 모호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용인되었다. 암묵적이고 보이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시적인 행동이어야 했다.
P.161
"난 전장에서 죽을 거야." 곤트가 말했다. "네가...... 네가 나를 예전 모습으로 기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P.185
엘우드가 시를 암송할 때면 곤트는 늘 좋아했다. 엘우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4학년 내내 엘우드는 곤트 앞에서 소네트를 암송했다. 엘우드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오로지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정말로 사랑을 고백했다면 곤트는 굉장히 불편해했을 것이다. 어쨌든 곤트는 엘우드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네트 때문에라도.
P.197
엘우드가 여자였다면 손을 잡고 관자놀이에 키스했을 것이다. 반지를 사서 둘의 삶을 하나로 묶었을지도 모른다.
P.205
엘우드와 함께한 휴가가 곤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이 시간이 끝나리라는 사실뿐이었다. 이윽고 일어날 일들로 곤트는 부서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알 수 없는 기적으로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그렇게 키스하고 시를 낭송하고 섹스하며 화창하고 나른한 몇 주를 보낸 뒤, 엘우드가 모드와 결혼하는 모습을 자신이 과연 지켜볼 수 있을지 곤트는 알 수 없었다.
P.507
"난 상관 안 해." 모드가 다시 말했다.
P.526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결정했어." 곤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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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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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을 쓰는 걸까 쓰는 동안 과거의 폭력을 되새기며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의붓아버지를 역겹게 표현하지 않는데도 읽는 내내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타인인 나도 고통스러운데 저자를 걱정하게 된다. 다만 이 글의 쓰는 행위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고 바란다.

P.30
그가 나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그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아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겠다고 했다. 나중에는 이런 말도 했다. 만약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받아들이고, 마치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를 받아들인다면, 태도를 바꾸겠다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건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 짓을 그만두는 대가로 조건을 달았다. 내가 그에게 상냥하게 굴라는 것,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상냥한 척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럼으로써 그 일이 끝났다.
P.77
어떤 작가들은 자기들의 옛날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기이함을 느낀다지만, 나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그 소녀는 나고, 그 일은 지금의 일이다.
P.134
강간범들은 존재하기 위해 강간한다. 어쩌면 강간하기 전에는 그 점을 모를 수도 있다(생각건대 강간범들 대개는 그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게 명백한 사실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그 행위는 피해자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그건 힘이 생겨나게 하는 행위, 자기 자신으로부터 퍼져나가는 힘이 생겨나게 하는 행위다.
P.235
나에게 읽기를 가르쳐 준 사람은 내 아버지지 그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나만의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내게 주었고,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법과 고독을 즐기는 취향을 물려주었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면서 문학에 대한 사랑이 생겨났다. 하지만 내 의붓아버지는 언어의 이중성과 침묵의 이중성을 알게 해주었다. 둘만의 그 내밀한 관계, 그것에 대한 혐오감. 내 글쓰기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P.337
그런 작가들이 자기들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도달할 때, 그들이 해방되는 것이다. 고통보다 더 큰 것, 개인적인 경험보다 더 큰 것, 내가 처음에 말했던 강력한 적보다 더 큰 것에 도달할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문학을 발견하게 되면 극도의 위험으로 가득 찬 우주, 삶의 힘과 죽음의 힘이 서로 맞서는 세계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다른 땅에 다다를 수도 있다. 위안이 바로 그것이다. 위안의 한 형태, 누군가를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할 만큼 충분한 위안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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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 뱀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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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마틸드는 청부살인을 하는 노년의 킬러다. 그러나 인지 능력의 저하로 규율을 어기고 잘못된 타깃을 살해한다. 이를 눈치챈 전 동료이자 현재 관리자인 앙리는 마틸드를 제거해야 한다. 오락가락 뒤죽박죽인 마틸드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이 위태로우면서도 폭주 기관차 같은 행동에도 그에게 계속 따르는 운까지 이 소설의 결말이 궁금해 순식간에 책을 읽었다.

P.16
주름이 늘고, 체중이 빠지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손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P.84
그녀는 유령이자 수호신이었고, 뮤즈이자 부적이었으며, 여신이자 악마였다. 앙리를 놀라게 한 것은 많은 남자들이 이 여자를 갈망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구애에 응했을까? 그녀를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79
마틸드는 더 이상 마틸드가 아니고, 정신 나간 헛소리들을 하고 있다. 그녀는 모두에게 너무나 위험해졌고, 이 상황이 더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직접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아니, 그는 할 수 없다. 그녀를 쏜다는 것은 그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다.
문제를 다른 식으로 해결해야 하리라.
P.269
앙리, 이런 친구들의 문제점이 뭔지 알아? 그것은 이들이 종종 타깃을 과소평가한다는 사실이야. 나 같은 늙은 아줌마는 한 입 거리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이것은 고전적인 착각이야. 남자들은 여자들에 대해 희한한 관념을 품고 있어. 특히 나이 든 여자들에 대해서...... 이제 그 친구는 이 문제에 대해 명상해 볼 시간이 없겠지만, 앙리, 넌 이번 일에서 뭔가 교훈을 얻길 바라.
P.329
그날 여기에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여자다.
이 여자가 테비와 르네를 죽였다.
경찰에 전화해서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로부터 한 15분이나 지났을까, 선생은 그 종이를 발견 하지만,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진다.
P.335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운이 좋았는데, 이 운이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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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록
듀나 지음 / 래빗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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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록』은 세계관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미 한 번 망한 거 같다. 의식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미향의 존재가 만화책 〔영원의 안식처〕를 떠올리게 했다. 화성에서 가져온 미생물 42호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 의식은 AI가 생각났고 결국 인간을 숙주로 한 전염병을 없애는 방법이 인간의 멸망이라면, AI가 인간을 위협할 때(음모론에 가깝지만) 모든 전자기기를 없애는 방법뿐이겠구나 싶었다. 역시 SF는 가상의 이야기 같아도 현실과 맞닿아있기에 재밌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듀나 작가의 초기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을 읽는다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는 SF의 미래 예측적인 면을 찾아보는 것도 책을 읽는 재미를 높일 것이다.

P.124
”단순히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개념의 종류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몰라도요. 하여간 이 마약에 대해 알아내자마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 했습니다. 우린 오래전부터 신디케이트의 이상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암살자의 등장도 그런 이상행동 중 하나였지요. 뭔가 우리가 모르는 것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를 몰랐을 뿐이죠. 이젠 알았습니다. 모두 그 새 마약 때문이지요.“
P.319
살아 있는 건 우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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