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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평점 :
생존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을 쓰는 걸까 쓰는 동안 과거의 폭력을 되새기며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의붓아버지를 역겹게 표현하지 않는데도 읽는 내내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타인인 나도 고통스러운데 저자를 걱정하게 된다. 다만 이 글의 쓰는 행위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고 바란다.
P.30
그가 나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그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아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겠다고 했다. 나중에는 이런 말도 했다. 만약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받아들이고, 마치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를 받아들인다면, 태도를 바꾸겠다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건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 짓을 그만두는 대가로 조건을 달았다. 내가 그에게 상냥하게 굴라는 것,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상냥한 척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럼으로써 그 일이 끝났다.
P.77
어떤 작가들은 자기들의 옛날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기이함을 느낀다지만, 나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그 소녀는 나고, 그 일은 지금의 일이다.
P.134
강간범들은 존재하기 위해 강간한다. 어쩌면 강간하기 전에는 그 점을 모를 수도 있다(생각건대 강간범들 대개는 그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게 명백한 사실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그 행위는 피해자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그건 힘이 생겨나게 하는 행위, 자기 자신으로부터 퍼져나가는 힘이 생겨나게 하는 행위다.
P.235
나에게 읽기를 가르쳐 준 사람은 내 아버지지 그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나만의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내게 주었고,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법과 고독을 즐기는 취향을 물려주었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면서 문학에 대한 사랑이 생겨났다. 하지만 내 의붓아버지는 언어의 이중성과 침묵의 이중성을 알게 해주었다. 둘만의 그 내밀한 관계, 그것에 대한 혐오감. 내 글쓰기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P.337
그런 작가들이 자기들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도달할 때, 그들이 해방되는 것이다. 고통보다 더 큰 것, 개인적인 경험보다 더 큰 것, 내가 처음에 말했던 강력한 적보다 더 큰 것에 도달할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문학을 발견하게 되면 극도의 위험으로 가득 찬 우주, 삶의 힘과 죽음의 힘이 서로 맞서는 세계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다른 땅에 다다를 수도 있다. 위안이 바로 그것이다. 위안의 한 형태, 누군가를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할 만큼 충분한 위안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 열린책들에서 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