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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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아라는 낯선 작가의 이름처럼 그의 소설도 그랬다. 이 소설들은 실험적이고 난해하며 거침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몇 편은 연작소설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 화자의 기이한 행동은 마지막 수록작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까지 읽으니 알 수 있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한 행위였음을.

_P.80
내 부모는 아주 많은 순간에 나를 수치스러워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수치심을 연기했다. 서울의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내가 당장이라도 죽기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하듯이 나와 부모를 노려 보았고, 그럴 때마다 부모는 성심성의껏 수치심을 공표했다. 저도 제 아이가 부끄럽습니다. 이런 아이를 낳아서 죽도록 죄송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 부모를 조금 용서했다. 나는 그 모든 걸 나와 무관한 연극을 감상하듯이 지켜보아야 했다.
『서울 장미 배달』

_P.130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죄를 지은 아이는 이야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이야기 안에 영영 갇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다. 나는 어쩌면 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악단』

_P.151
진희가 침묵을 깼다. ”악착같이 놀자, 악착같이, 모든 기념일을 다 챙기고, 모든 축제에 다 참여하고, 모든 하찮고 기쁜 일에 요란을 피우자.“ 그녀의 목소리는 기쁘기보다 화가 나 보였다. 매우 많이 화가 나 보였다.
『초록 땅의 수혜자들』

_P.245
그런 식의 기이한 충동, 해명 불가능한 충동이 나를 어떤 장소로 끌어당기거나 어떤 행위를 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종종 불가해한 것에 매료되고,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혹은 바로 그 무의미함 때문에 온몸을 던져 다이빙한다.
『사하라의 DMZ』

_P.333
우리는 신을 만날 수 없으니 스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뛰어내려야 할 때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온다면 뛰어들라. 결코 물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 날에 입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면 수치심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도망치라. 겉옷을 벗어던지고, 명령을 거역하고, 삶을 모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수가 있더라도 일단 살아남으라. 일단 살아남아 돌아오라.
_P.368
다이빙이 끝나고 로그북을 적으며, 나는 바다에 가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이 내게 생존의 문제였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예비 호흡기를 물고 있던 그 순간뿐만이 아니라 정말이지 평생 동안 내가 살고 싶어 했음을,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잖은 양의 소설과 시를, 일기를, 이런저런 기록들을, 여러 장의 유서를, 거창한 버킷 리스트를 쏟아내듯이 쓰는 일을 통하여 내가 생존해왔음을 알았다.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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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커 래빗홀 YA
이희영 지음 / 래빗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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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남겨둔 수많은 if는 결국 현재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현재에 영향을 주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 ‘라잇 나우. 이제 앞으로의 세계에서 살아.’(P.254)

_P.82
그러나 인생에서 뒤늦은 'if'는 의미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그 길로 갔더라면, 그 선택을 했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고, 아니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지나간 if는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이라 말할 수 있었다. 무의미하게 과거를 생각하고 그때마다 반복되는 후회로 아쉬워하니까.
_P.86
삶은 과거에서 현재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삶이란 어쩌면 그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인지도 몰랐다. 시간은 때때로 훌쩍 건너뛰기도 하고, 한곳에 오롯이 멈춰 있기도 하니까.
_P.97
평생을 오직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많은 '나'들이 찰나에 존재했다, 덧없이 사라지고 다시 존재함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탈피하고 그 껍질을 버리는 갑각류처럼,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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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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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 작가들의 등장으로 한국 문학은 여성 중심 서사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여자만이 겪는 차별과 폭력 그것에 공감하는 여성 독자 중에 나도 포함된다. 그러나 피해자로만 서술되는 여성 서사에 싫증이 나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에 열광할 때 우리는 그렇게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또 피해자로만 그려질 그들과 뻔한 결말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서수 작가는 여성 독자에게 공감하게 하면서 하나의 의견을 제시한다. 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잠정적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벽을 쌓고 있었다. 마은이 하는 그 노력을 나도 해야 할 때일지도.

_P.36
이력서를 심사하는 동안 나는 지원자들의 인생이 종이 한 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놀랐다. 이력서 양식은 압축된 인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틀이었다. 그 틀 안에선 어떤 인생이든 쉽게 분류되기 마련이고, 회사의 인재 선발 기준에 맞춰 무엇이 부족하고 넘치는지 한눈에 드러났다. 서류 양식부터 인간을 가르는 잣대가 적용되었다. 왼편 상단의 사진(외모), 대학명과 학점(계급), 자격증 및 경력 사항(스펙), 자소서(열의). 이러한 형식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중요도에 따라 하향식으로 전개된다.
_P.133
사람이 아닌 동물만이 내가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편한 온기. 정다운 인사. 내가 하는 것만큼 나에게 정확히 돌아오는 호의. 나를 두렵게 만들지 않는 존재. 나는 그걸 길고양이에게 기대했다.
_P.205
돈을 낸다고 해서 모두가 손님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엔 자신을 왕처럼 받들지 않으면 언제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짓밟으려는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다. 자신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의 인생과 인격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딜 가나 있는걸.
_P.219
"보영 씨, 이 일 때문에 누군가를 믿지 못하게 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리 의심하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요."
"의심하지 않는 건 어려워요."
이미 상처가 되었으니까. 이 일로 민감해진 어떤 감각이 있으니까.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만 마요. 당연히 이런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런 한계요."
"여자라서."
"맞아요. 여자라서 당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요."
"불필요한 마음일까요?"
"선험적으로 품고 살아가는 건 하지 마요. 경험하지 않았는데 이미 경험한 것처럼 살지는 말라고요."
"그런 게 집단 무의식 아니에요?"
"글쎄요."
"집단 무의식이 우리를 살릴 때도 있지 않아요?"
"무의식과 경험을 분리해봐요."
"언니는 그게 돼요?"
"우리는 경험을 하며 살아가지, 무의식이 현실로 드러나길 바라며 살아가진 않잖아요."
"저도 그런 걸 바라진 않아요. 그래도 우리를 지켜줄 때가 있잖아요."
"움츠러들게 할 때도 분명히 있고요."
우리의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이윽고 언니가 말했다. 원래 어떤 일이든 양가적인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그 말을 힘겹게 한 단어씩 천천히 내뱉 었다.
"언니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노력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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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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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전 소설의 노란 장판 감성을 오랜만에 느꼈다. 개인적으로 성장 소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글들에 크게 공감하지 않는데 가족이라는 소재는 시대가 변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이경은 엄마의 죽음으로 외할아버지, 이모, 삼촌과 좁은 셋방에서 살게 된다. 이경은 그들과 함께하고 싶기도, 그곳을 떠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모가 가족을 떠나고 할아버지의 죽음, 삼촌의 입원으로 혼자가 되자 겁이 나고 유일하게 돌아온 삼촌이 집을 떠날까 불안하다. 이경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보여진다. 그 여자라고만 부르던 삼촌의 연인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을 보니 가족은 너무 당연해서 관계를 위한 노력이 어색할 때가 있지만 그렇게는 유지될 수 없는 것 같다.

_P.85
기억할 게 많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툭툭 털어내버린다. 몸은 빈 도시락처럼 가벼워진다.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집어든다. 엄마의 손을 잡은 소녀도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다. 저녁 여덟 시 오 분이다. 기차는 오 분 늦게 도착한다. 사람들은 철로 가까이로 다가가 줄을 선다. 나는 기둥을 두 손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동쪽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다. 짙은 보랏빛과 회색이 뒤섞인 구름이 가득하다. 나는 사람들의 맨 끝에 가서 줄을 선다. 처르륵, 열차 문이 열린다.
_P.93
할아버지는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태풍이 치는데도 왜 천막 안에서 잠을 잤을까. 꽃들은 왜 죽지 않은 걸까. 채송화, 분꽃, 그리고 뒤늦게 핀 봉숭아꽃. 꽃들은 활짝 피어 있다. 이틀 동안 무섭게 비가 퍼부었고 나는 꽃들을 돌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물도 주지 않았고 쓰레기들을 골라내지도 않았다. 한데도 꽃들은 만개했다. 몇 개 대궁은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긴 하지만 뿌리가 뽑힌 것은 없다. 이상한 일이다.
_P.101
아가씬 내 이름 알고 있어요? 그녀가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안마시술소 안내원이나 아니면 이모가 불렀던 것처럼 그 여자, 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삼촌은 그녀를 어떻게 부를까. 내 이름은 양미순이에요, 양미순. 그녀가 후르륵 제 이름을 알려준다.

작품 해설, 김미현
불행은 우성이고 행복은 열성이다. 그래서 불행은 유전되지만 행복은 유전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데, 노력해야만 행복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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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바이브 - 시를 친구 삼아 떠나는 즐겁고 다정한 여행기
김은지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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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강아지와 산책할 때 코스를 정하지 않고 강아지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데 작가의 산책도 나와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모르던 가게도 알게 되고 다음에 저기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극내향형 인간인 나에게 주변을 확장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익숙한 장소만 가다가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일이 가끔은 즐겁다. 그래서 작가가 산문집에서 공유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_P.24
놀라운 사실이 너무나 많지만 그중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130여 개의 다른 이름, 즉 이명을 쓰며 수많은 정체성이 담긴 작품을 남긴 이력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페소아는 이명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알베르투 카에이루‘라는 이름으로 가장 목가적 시를 쓰는 체험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요즘 방송인들이 많이 하는 ”부캐“ 세계관과 닮아 보이기도 한다. 생소한 이름을 붙이고 평소의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는 일. 나답다는 관념을 넘어서 더 나다워지는 순간.
_P.45
도탑다?
두텁다와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도톰하다처럼 간지러운 이 단어는 서로의 관계에 사랑이나 인정이 많고 깊다는 뜻이었다. 도타울 수 있는 것들로는 신의, 우애, 정 같은 게 있겠다. 가능하다면 의사소통 능력도 도타워지면 좋겠다. 문장력도, 선물 고르는 센스도, 방 정리 솜씨 같은 것도 도타워지면 좋겠다. 도탑다, 도탑다, 하고 단어를 굴리자 마음이 장갑을 낀 것처럼 따스해졌다.
_P.55
헤어지는 고통의 크기를 생각하면 웬만하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나아 보인다. 악의 없이 그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괴롭게 하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아픈 말을 하고, 화해하려고 찾아갔더니 다른 사람과 키스하고 있다니. 사랑의 기억을 삭제해서라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만하다. ’다들 무슨 배짱으로 사랑 같은 것에 빠지는 거야.......‘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은 참 용감한 것 같다.
_P.132
한편으로 ’좋아하고 있지 않은 상태‘의 평온함을 좋아한다. 설거지를 말끔하게 끝내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감기를 조심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바란다.
_P.163
다시 올 수밖에 없겠네. 다산생태공원도, 땡큐버스도 남겨두고 집으로 왔다. 자전거도 타고 막국수도 먹어야지. 다음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남겨둔 것 같아 든든했다.
_P.189
덜 좋아하면 좋을 텐데, 어떻게 덜 좋아하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계속 좋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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