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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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 작가들의 등장으로 한국 문학은 여성 중심 서사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여자만이 겪는 차별과 폭력 그것에 공감하는 여성 독자 중에 나도 포함된다. 그러나 피해자로만 서술되는 여성 서사에 싫증이 나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에 열광할 때 우리는 그렇게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또 피해자로만 그려질 그들과 뻔한 결말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서수 작가는 여성 독자에게 공감하게 하면서 하나의 의견을 제시한다. 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잠정적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벽을 쌓고 있었다. 마은이 하는 그 노력을 나도 해야 할 때일지도.

_P.36
이력서를 심사하는 동안 나는 지원자들의 인생이 종이 한 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놀랐다. 이력서 양식은 압축된 인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틀이었다. 그 틀 안에선 어떤 인생이든 쉽게 분류되기 마련이고, 회사의 인재 선발 기준에 맞춰 무엇이 부족하고 넘치는지 한눈에 드러났다. 서류 양식부터 인간을 가르는 잣대가 적용되었다. 왼편 상단의 사진(외모), 대학명과 학점(계급), 자격증 및 경력 사항(스펙), 자소서(열의). 이러한 형식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중요도에 따라 하향식으로 전개된다.
_P.133
사람이 아닌 동물만이 내가 원하는 감정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편한 온기. 정다운 인사. 내가 하는 것만큼 나에게 정확히 돌아오는 호의. 나를 두렵게 만들지 않는 존재. 나는 그걸 길고양이에게 기대했다.
_P.205
돈을 낸다고 해서 모두가 손님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엔 자신을 왕처럼 받들지 않으면 언제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짓밟으려는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다. 자신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의 인생과 인격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딜 가나 있는걸.
_P.219
"보영 씨, 이 일 때문에 누군가를 믿지 못하게 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리 의심하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요."
"의심하지 않는 건 어려워요."
이미 상처가 되었으니까. 이 일로 민감해진 어떤 감각이 있으니까.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만 마요. 당연히 이런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런 한계요."
"여자라서."
"맞아요. 여자라서 당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요."
"불필요한 마음일까요?"
"선험적으로 품고 살아가는 건 하지 마요. 경험하지 않았는데 이미 경험한 것처럼 살지는 말라고요."
"그런 게 집단 무의식 아니에요?"
"글쎄요."
"집단 무의식이 우리를 살릴 때도 있지 않아요?"
"무의식과 경험을 분리해봐요."
"언니는 그게 돼요?"
"우리는 경험을 하며 살아가지, 무의식이 현실로 드러나길 바라며 살아가진 않잖아요."
"저도 그런 걸 바라진 않아요. 그래도 우리를 지켜줄 때가 있잖아요."
"움츠러들게 할 때도 분명히 있고요."
우리의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이윽고 언니가 말했다. 원래 어떤 일이든 양가적인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그 말을 힘겹게 한 단어씩 천천히 내뱉 었다.
"언니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노력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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