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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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전 소설의 노란 장판 감성을 오랜만에 느꼈다. 개인적으로 성장 소설을 제외하고 이 시대의 글들에 크게 공감하지 않는데 가족이라는 소재는 시대가 변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이경은 엄마의 죽음으로 외할아버지, 이모, 삼촌과 좁은 셋방에서 살게 된다. 이경은 그들과 함께하고 싶기도, 그곳을 떠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모가 가족을 떠나고 할아버지의 죽음, 삼촌의 입원으로 혼자가 되자 겁이 나고 유일하게 돌아온 삼촌이 집을 떠날까 불안하다. 이경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보여진다. 그 여자라고만 부르던 삼촌의 연인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을 보니 가족은 너무 당연해서 관계를 위한 노력이 어색할 때가 있지만 그렇게는 유지될 수 없는 것 같다.

_P.85
기억할 게 많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툭툭 털어내버린다. 몸은 빈 도시락처럼 가벼워진다.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집어든다. 엄마의 손을 잡은 소녀도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다. 저녁 여덟 시 오 분이다. 기차는 오 분 늦게 도착한다. 사람들은 철로 가까이로 다가가 줄을 선다. 나는 기둥을 두 손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동쪽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다. 짙은 보랏빛과 회색이 뒤섞인 구름이 가득하다. 나는 사람들의 맨 끝에 가서 줄을 선다. 처르륵, 열차 문이 열린다.
_P.93
할아버지는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태풍이 치는데도 왜 천막 안에서 잠을 잤을까. 꽃들은 왜 죽지 않은 걸까. 채송화, 분꽃, 그리고 뒤늦게 핀 봉숭아꽃. 꽃들은 활짝 피어 있다. 이틀 동안 무섭게 비가 퍼부었고 나는 꽃들을 돌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물도 주지 않았고 쓰레기들을 골라내지도 않았다. 한데도 꽃들은 만개했다. 몇 개 대궁은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긴 하지만 뿌리가 뽑힌 것은 없다. 이상한 일이다.
_P.101
아가씬 내 이름 알고 있어요? 그녀가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안마시술소 안내원이나 아니면 이모가 불렀던 것처럼 그 여자, 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삼촌은 그녀를 어떻게 부를까. 내 이름은 양미순이에요, 양미순. 그녀가 후르륵 제 이름을 알려준다.

작품 해설, 김미현
불행은 우성이고 행복은 열성이다. 그래서 불행은 유전되지만 행복은 유전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데, 노력해야만 행복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P.107)

✦ 작가정신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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