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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어류 분류학자의 삶
저자 룰루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따라가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생명과학에 관한 내용으로, 큰 업적을 남긴 어류 분류학자의 삶을 조명한다.
저자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로,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19세기 어느 과학자의 삶을 흥미롭게 좇아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생명의 나무가 완성되면 모든 동식물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밝혀질 거라고 했다. 그의 전문분야는 어류로 새로운 종을 찾아 지구를 항해하며 보낸 분류학자로,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1/5가 그와 그의 동료 등에 의해 발견되었다.
데이비드는 다윈이 신을 없애버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추구는 여전히 고귀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자연의 사다리의 형태,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지위가 정해져 있는지를 드러내줄 가장 높은 청사진에 대한 추적을 계속 이어갔다. (…) 데이비드는 물고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상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진짜 창조 이야기, 인간을 만드는 데 어떤 생명의 실험들이 필요한지를 알아내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생물들의 우연한 실수와 성공들 속에 쓰여 있는, 잠재적으로 인류가 더욱더 진보하도록 도와줄 실마리들을 찾는 것이었다.
4. 꼬리를 좇다, P. 76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5.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P. 95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 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5. 유리 단지에 담긴 기원, p93~95
누구든 항상 옳을 수 없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물고기의 이름은 표본 번호 #51444,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로 1904년 일본 연안에서 발견하여 명명한 것이다. 속명 아고노말루스는 '모서리가 없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고, A(없다) + gonias(각, 모서리)로, 이 종의 물고기들이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서리가 없는 조던, 뫼비우스 띠처럼 두 개의 면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면 두면 사이의 경계는 결코 찾을 수 없다.
루서 스피어는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 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 그는 자신의 관용과 관대함을 자랑스러워했다. (...) 하지만 조던은 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분류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인생에 폭력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에 대해서는 사후에 책임을 져야 했다.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니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권력을 이용해 상황을 합리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모든 것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치는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밝혀지게 되어있다. 취향이 아니면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머리에 남지 않을 수도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