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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직간
이이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율곡이 <동호문답>을 쓴 선조 즉위 초의 시기는 사림들이 드디어 성리학에 입각한 정치, 즉 도학 정치를 이 땅에 실현시킬 수 있는 시기라고 보았다. 조선 초에 있었던 네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통해 사림들도 처형, 유배당하는 화를 입었지만 왕실의 인척이면서 신하인 척신들과 간신들 역시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사화를 통해, 그리고 역사를 뒤돌아보며 큰 교훈을 얻었다. 특히 중종 대 조광조의 개혁과 그 실패를 거울삼아 율곡은 급진적 개혁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개혁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그것은 개혁을 꺼리는 대신급의 신하들이었다. 율곡은 이러한 무리들을 동지로 분류되는 사류와 대립지점에 있는 세력으로 간주하며 ‘유속’이라고 불렀다. 유속은 사류의 적이자 도학과 개혁을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율곡은 선조 임금 역시 그러한 유속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호문답>에서는 유속의 견해를 반박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속이 개혁을 거부하는 논리는 분명했다. 선대 임금 때의 제도나 법, 이른바 조종지법을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정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결국 율곡이 제안한 갖가지 개혁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만언통사>는 당시 흰 무지개가 해를 뚫고 지나는 현상인 재이가 일어나자 선조가 제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 데 대해 율곡이 올린 상소이다. 선조의 구언 교서가 직접적인 원인이잠나 이미 정치가 잘못되고 있음을 통감하던 율곡은 그 이전에도 <만언봉사>와 유사한 제언을 꾸준히 해왔다. 선조 대에는 이미 척신과 간신이 조정에 없고 사림들이 정치를 하기 시작했지만 정치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민생은 궁핍했으며 나라 안에 온갖 비리와 부패가 만연했다. 22-23p
율곡은 특이하게도 시문 대신 <동호문답>이라는 장문의 정교한 정치 이론서이자 정책 제안서를 제출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 임금이 ‘자세히 살펴보았다’라고 기록되었지만 율곡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동호문답>은 문답체 형식으로 쓰였는데, 질문과 대답이 매우 논리적으로 짜여 있어서 읽다 보면 실제로 눈앞에서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는 것 같다. 율곡은 홍문관 교리이자 경연관으로 선조 앞에서 강의하고 면대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선조 임금을 가르치거나 잘못을 지적하였다. 선조는 그런 지적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논지를 흐리거나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곤 했다. <동호문답>의 손님과 주인이 나누는 문답은 마치 그런 선조의 성향을 계산한 것처럼 나올만한 반박을 미리 예상하여 쓰인 것 같다. 그렇게 하여 율곡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졌다. 18-19p
율곡 이이가 올린 상소, 그리고 이율곡의 정치개혁론을 현재 사회에 대입해보는 것. 사실 책의 소개만 읽었을 때는 그 내용이 상당히 어려울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한글로 쉽게 잘 풀어서 옮기기도 했을 것이고, 율곡 이이의 글솜씨가 좋아서도 생각보다 쉽게 읽었다. 쉽게 읽으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고. 위에 적혀있듯이 동호문답의 경우 손님과 주인의 대화로 되어 있었고, 또 그 주인의 대답을 읽으면서 내가 궁금해할만한 부분에 대해서 손님이 또 질문을 이어가기에 책에서 설명한 ‘문답을 통해서 내용을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 실질에 힘씀이 자기수양의 첩경임에 대하여 / 실질적 수양이 훌륭한 정치를 만든다
(손님이 말하였다)
“주상께서 삼대의 이상적인 통치를 다시 실현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을 급선무로 해야 합니까?”
(주인이 말하였다)
“뜻을 세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예부터 큰일을 하려는 임금 중 먼저 자신의 뜻을 바로 정하지 않은 분이 없었습니다. (...) 주상께서 성심껏 이런 것들에 뜻을 두신다면 성인을 본보기로 삼으셔야 합니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으시고 반드시 그들로부터 배운 후에야 삼대의 이상적인 통치가 다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손님이 말하였다)
“뜻이 이미 섰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인이 말하였다)
“뜻을 세운 후 실질에 힘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 아침 내내 밥상을 배부르게 먹지 못한 것처럼, 공허한 말은 실질이 없으니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경연에서 행해진 토론, 상소문, 왕께 올리는 문장 중에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한 훌륭한 제안이나 직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폐단도 개혁되지 못했고, 단 하나의 정책도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다만 실질적인 효과를 보는 것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상께서 통치를 잘 해내어 옛 도를 다시 실현하고자 하신다면 실질적인 효과를 보는 것에 노력을 기울이셔야 하고 문구를 일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112-115p
나는 항상 책을 읽을 때 (주로 심리학 책을 읽을 때기는 하지만) 그 책을 내용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타 정치인들, 혹은 지금까지 접해온 윗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지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를 돌아봤다. 그 중에서 위의 문답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먼저 뜻이 서야 하고, 뜻이 선만큼 그에 대한 실질적인 변화가 중요하다는 거. 모르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걸핏하면 잊어버리기가 쉬운 내용. 나의 목표를 바라보고 움직이자. 구정도 지났으니까.
처음에 적었듯이 율곡 이이의 상소문을 책으로 옮겼는데 놀라울 정도로 글이 어렵지 않다. 가능한 우리가 읽기 편하게 잘 다듬어서 나온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소문을 올리게된 전후 사정이나, 역사적 사실들 역시 중간중간 넣어놓아서 그 글의 생명력을 더 일깨워준다.
분명히 이 책을 읽고나면 나처럼 여러 사람들, 특히 현재의 여러 정치인들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직접 가서 그런 부분을 전달하거나 이 책을 선물할 예정이 아니라 그냥 불평불만만 가질 것이라면 그런 부분에 에너지를 쏟느니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국가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의 삶을 다스리고, 내 일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애국이고 우리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일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자신을 또 대한민국의 현재를 잘 바라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