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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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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아입니다. 정아가 손을 들어 멀리 진지 외곽에 펼쳐진 장군풀밭을 가리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르르 떨립니다.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한 용이가 달려 나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섭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 여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도망치세요! 살고 싶으면 절대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오글오글 몰려 앉아 떨고 있는 여인들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이가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킵니다.
"북서쪽이에요. 무조건 북서쪽으로 가세요. 호랑이 산 반대쪽입니다. 일본군들은 모두 호랑이 산으로 몰릴 거예요. 북서쪽으로 하루를 넘어가면 삼기봉 자락에 있는 삼기 마을이 나와요. 얼른 뛰세요! 모두 살 수 있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온 용이 뒤로, 여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옵니다. 뛰쳐나온 여인들이 북서쪽 방향의 붉은소나무 숲속으로 사라집니다. 용이가 다케모노의 천막 옆에 매여 있는 주인 잃은 검정말에 훌쩍 올라탑니다. 놀란 다케모노의 말이 히히힝 울며, 앞발로 허공을 차는가 싶더니, 곧이어 불타오르는 막사들 사이를 뚫고 속력을 내 달려 나갑니다.
장군풀밭 끄트머리에서 말고삐를 잡고 순이를 기다리던 가즈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적의 700부대 진지가 공격을 받아 불타오르다니요. 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공격이 치명적이었는지 진지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가즈오는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중공군일까? 아니면 조선 독립군일까?’
이 엄청난 상황을 나름대로 가늠해 보는 가즈오의 두 눈에 멀리 장군풀밭 중간쯤에 머물러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가물가물 보이는 듯합니다.
"순이 씨와 아쯔이다."
확신한 가즈오는 더 지체하지 않고 말에 올라 장군풀밭으로 뛰어듭니다.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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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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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을 맞은 말이 하얀 콧김을 내뿜으며 재빠르게 내달립니다. 누런 밤색의 장군풀밭 중간 지점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 돌아가야 해요. 정아랑 다른 여자애들이 저 불타는 천막 안에 있어요."
애타는 순이가 애원합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빨리 가. 가즈오 님이 건너편에서 기다린단 말이야."
"안 돼요. 저 혼자 갈 수 없어요. 문을 열어 주어야 해요. 문이 밖에서 잠겨 있단 말이에요."
가냘픈 순이가 이 순간만큼은 바위처럼 단호합니다. 아쯔이가 순이의 팔을 움켜잡으려는데, 순이가 완강하게 뿌리칩니다.
"저 혼자 안 가요. 저 불쌍한 애들 두곤 못 가요."
철썩!
아쯔이가 순이의 뺨을 때립니다. 순이의 고개가 옆으로 꺾입니다.
"네가 못 구해. 네가 다 못 구해. 어서 가. 너라도 구하란 말이야. 시간이 없어."
애가 탄 아쯔이가 순이에게 소리를 지르더니, 순이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습니다. 강제로라도 끌고 갈 모양입니다.
장군풀밭 건너편에서 중앙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가즈오의 시야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아쯔이와 순이입니다. 높다란 장군풀 때문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합니다. 이제 잠시 후면 만날 수 있습니다. 50미터, 40미터, 30미터……. 애타게 기다리던 순이의 얼굴이 이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즈오는 반가운 마음에 순이의 이름을 소리쳐 부릅니다.
"순이 씨!"
아쯔이와 순이도 가즈오를 발견합니다. 아쯔이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가즈오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바로 그 순간,
어흐흥!
장군풀밭 속의 세 사람에게 포효가 들려옵니다. 그들이 들은 소리는 분명 사람의 소리가 아닌, 성난 호랑이의 엄청난 포효입니다. 천둥 같은 맹수의 포효에 놀란 가즈오의 말이 갑자기 멈추려는 듯, 앞발을 허공으로 쳐듭니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가즈오가 말에서 떨어져 장군풀 사이로 뒹굽니다. 아쯔이와 순이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따라 동시에 뒤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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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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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말을 탄 용이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옵니다. 쓰러진 가즈오의 눈에도 용이가 보입니다. 커다란 호랑이 가죽을 걸친 거친 사나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 사나이의 커다란 주먹이 순이의 팔을 부여잡고 있던 아쯔이의 턱을 때립니다.
마치 철퇴에 맞은 듯, 아쯔이는 뒤로 다섯 자쯤 날아가 나자빠집니다. 호랑이 사내는 굵은 팔을 뻗어, 순이를 번쩍 안아 들더니 자신의 말에 태웁니다. 그리고 고삐를 틀어 북동쪽으로 치고 나갑니다. 이 모든 일이 가즈오의 눈앞에서 번개 치듯 순식간에 벌어집니다. 가즈오가 쓰러져 있는 아쯔이에게 달려갑니다. 아쯔이는 단 한 번의 주먹에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렸습니다. 가즈오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는 호랑이 사내와 순이가 탄 말이 이미 장군풀 너머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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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게 문제야. 뭐든 농담으로 웃어넘기잖아. 난 심각하게 말하는 거야. 웃을 일이 아니야."
그 일은 반복되었다. 나는 원진과 만날 때마다 취했고 취할 때마다 추태를 부렸고 원진은 그때마다 자길 좋아하냐고 물었다. 이상하게도 그 일이 거듭될수록 부끄러움은 점점 옅어졌다. 맨 처음에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아주 선명했다. 하지만 점점 희석되었다. 열화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부끄러움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와 아주 선명해질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원진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곤란하다고 여기며 원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순전히 내 감정의 편의를 위해서. 그것은 아주 유아적이고 치졸한 생각이라서 나중에는 그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낯이 뜨거워졌다.
"5월까지 어떻게 기다려. 당장, 당장 떠나자. 멀리, 아주 멀리."
술에 취했을 때 원진은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었는데 당장 떠날 수는 없었다. 당장은 휴가를 낼 수가 없었다. 오래 쉴 수 없었으므로 멀리 떠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시간을 쪼개어 다가올 삶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하나씩 해나갔다. 그런 게 삶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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