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영이 울음을 삼키며 꾸역꾸역 밥을 다 먹었다. 금남이 남겨놓은 쪽지가 필요했다. 항상 웃음 가득한 그 분의 한마디가.

매운 음식 할 때 손이 얼마나 에린지 몰라. 고춧가루가 살에 닿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 쓰려. 오늘은 에리고 아픈 건 내가 다 할 테니. 먹는 당신은 해피하기만 하슈. 해브 어 나이스 데이 혀고!

큰 눈망울에서 결국 눈물이 톡 떨어졌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서툰 손으로 수능 도시락을 싸주던 아버지가. 이런 목소리로 전화하면 왜 코맹맹이 소리가 나냐고. 울었냐고. 병원에서 무슨 말 들었냐고. 빙빙 둘러 물어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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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양쪽에 나란히 줄 서 있는 길, 모두 불이 꺼진 상가들 틈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왔다. 노란 은행잎들이 단정한 한옥 기와지붕 위에 곱게 쌓여 있었다. 그때 은발 머리를 집게로 잘 올린 70대 정도의 할머니가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콩알만 한 진주귀걸이를 한 그녀의 입가엔 많이 웃어 생긴 주름이 다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종소리가 들렸다. 운명을 만나면 종소리가 들린다는데 밥솥 위에 딸랑딸랑 흔들리는 추 소리가 종소리처럼 머리를 울렸다. 밥 냄새와 섞여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노랫말이, 종이에 글을 쓰며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할머니의 모습이, 좋았다. 깨끗하게 잘 닦인 진열장에 곱게 포장한 도시락을 칸칸이 올려놓는 주름진 손이 애틋해 보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올려 간판을 보았다. 달빛에 환히 비치는 간판은 보고만 있어도 따뜻했다. 맛나 도시락…. 맛나 도시락? 이건 그때 간호사가 준 도시락집…? 정이가 뒷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날카롭고 각진 은박지가 느껴졌다. 사각형으로 잘 접힌 은박 호일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조심스럽게 펼치자 흰 종이에 쓰인 글자가 보였다.

이렇게 눌러 담은 고봉밥을 먹고도 배가 고프다면 또 오슈. 리필 가능. 언제든 웰컴! 그럼 씨 유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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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땅에 사는 누구나처럼 지극히 한국인스럽게 살았다. 정신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혀 가는 대로 허겁지겁 먹었다. 정신이 없는 상태란 사실 굉장히 위험한 것인데 우린 그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게 우리 사회의 집단적인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
건강한 삶에 필요한 시간과 여유? 다 사치스런 얘기였다. 내 먹을거리에 최소한의 신경을 쓰는 게 사치처럼 여겨지는 삶, 내 건강을 지켜줄 단 한 시간조차 확보할 수 없는 삶… 이 자체도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건데,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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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생의 시작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는걸. 클라라, 나는 재회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 우리 입양인들은 ‘재회’라고 말하지 않아. 한국에 가서 옛 가족을 만나면 흔히 그들은 우리를 다시 만났다고 표현하지만, 우린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나는 거라고 생각해. 내 경우에는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보다 클라라나 수아처럼 정말로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 더욱 소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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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요가 수업을 받다가 늘 해오던 아사나 동작이 점점 더 어려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의 균형을 잡는 일이 하나의 도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다리와 등은 예전보다 덜 유연했고, 태양을 향해 몇 차례 절을 하고 나면 금세 숨이 가빠졌다. 그 이후로 내내 시련은 계속되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갈 때면 거의 매달리다시피 난간을 꽉 붙잡아야 했고, 지하철 안에서는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모욕을 받았다고 여겨야 하는 건지 몰라 나는 주춤거렸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안과 의사는 나에게 백내장 수술 진단을 내렸다.

‘백내장이라니! 완전히 노인 질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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