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페이지마다 밑줄을 빼곡히 그었던, 빨리 읽히는 게 아까워 한장 한장 유난을 떨며 여유를 부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첫 만남에 속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은 사람을 만난 기분. 말로도 하지 못하는 말들, 어쩌면 나에게는 영원히 단어가 되지 못했을 감정들이 페소아의 글을 통해 선명해졌다. 고독은 지독한 고통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늪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일상이라는 배가 침몰할 때마다 나는 페소아의 책을 붙들고 다시 뭍으로 떠올랐다.
나는 부딪히지 못했고 부딪힐 수도 없었던 일. 안도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까, 아니면 부끄러워해야 할까. 일상적인 차별과 편견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는 것, 어쩌면 불가항력이라고 체념할 수도 있는 무형의 압력속에서 동시대를 버텨온 수많은 김지영들의 마음을 뒤늦게 공감해 본다. 그리고 모처럼 물결이 된 희망이 바다가 되었으면..2019년생 김지영, 다른 이름의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려야 한다는.
내 삶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지만 사람은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내가 있어야 비로소 너도 있고 세상도 있다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게 어쩌면 나를 더욱 외롭고 아프게 만들 수도 있음을 기억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