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헬스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내일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그건 우리가 걱정할 바 아니고
우리 책임도 아니네. 다만 우리는 세상이 선사하는 기쁨을,
설사 그게 하늘에 펼쳐진 마법 같은 구름에 불과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누리고 찬미해야 할 것이네.
나는 내 시 나부랭이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고 한심스러운지
충분히 듣고 있네. 망령 든 노인네의 낭만이지 고철 덩어리지."
- 1959년 8월 한스 마인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 (98p)
헤르만 헤세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작가로서 작품에 담아내는 생각 말고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네요.
출판사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는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고자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책이라고 하네요. 《구름은 바람 위에 있어》는 독일문학 전문 편집자인 폴커 미헬스가 엮어낸 헤르만 헤세의 구름 찬가, 구름에 관한 문장들을 담은 산문 선집이네요. 스물여섯 살의 헤르만 헤세는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 (1903년)로 불과 몇 달 만에 독일어권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고 해요. 이 소설에 나오는 "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잘 알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155p)라는 문장은 구름 찬가로 독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필독 텍스트라고 하네요. 헤세의 시에서 구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구름에 대한 헤세의 관심은 시뿐만이 아니라 산문과 성찰 글, 단편소설, 장편소설, 여행 중에 쓴 글과 편지를 통해 드러나네요. 이 책에서는 구름을 바라보는 헤세의 마음이 담긴 문장들을 만날 수 있어요. 위대한 작가 헤르만 헤세의 정체성은 시인이었네요. 시인들은 늘 자유와 구속되지 않음을 꿈꾸며 노래하는 것 같아요. 새처럼, 구름처럼... "내가 볼 때, 구름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드는 건 바로 그 움직임이다." (9p) 헤세는 우리 눈에 죽은 공간으로 비치는 하늘에서 거리감과 크기,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구름이며, 하늘은 구름 덕분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로써 하늘은 땅의 연장이 되어 우리를 그 공간과 연결시켜 준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구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음을 고백하네요. 바람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며 흘러가는 구름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들인데 헤세의 문장을 읽으면서 공감했네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묵직한 구름 가장자리에서 연노랑 햇살이 솟구쳐 올라 동쪽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 온 하늘이 순식간에 주황색으로 물들어고, 작열하는 진홍빛 구름 띠들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 이윽고 모든 노란빛이 사라졌고, 붉은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지면서 베일처럼 아련하고 하늘하늘한 구름을 천국의 빛으로 감싸며..." (42p) 폭풍이 지나간 자리, 묵직한 구름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천국의 빛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정말 그 찰나의 순간이 주는 경건함이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을 느꼈네요. 헤세는 저녁 시간에 발코니에 앉아 저녁 구름을 바라볼 때면 행복에 가까운 감정에 젖는다고 이야기하네요. '나만의 저녁 시간'에는 언제나 구름이 함께한다고, 자신의 보금자리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구름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저녁 구름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구름이 되어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는 거죠.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난 상관없어. 나는 이 세상에서 행운을 누리지 못했어. 원래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지. 세상은 그런 반골적인 나에게 수없이 회초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어.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세상에 저항하며 버텨 왔어. 비록 잘나가는 공장주나 권투 선수, 영화배우처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열두 살 소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 왔던 그 인간, 즉 시인이 되었어.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분명히 깨달은 게 있어. 세상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자기 눈으로 조용히 주의 깊게 관찰하기만 하더라도 세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는 사실이지. 세상이 총애하는 성공한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세상을 구경할 줄 아는 기술은 훌륭한 예술이야. 그것도 정교하고 치유적이면서 종종 무척 즐겁기까지 한 예술이지!' (132p)
저녁 구름을 통해 예술을 배웠다는 헤세, 우리는 그 헤세의 문장들을 통해 인생을 배울 수 있네요. 구름의 자유, 갈망, 저항 그리고 덧없음이 우리에겐 여행과 투쟁, 휴식과 축제의 삶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