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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시간과공간사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송용구 옮김 / 시간과공간사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싱클레어, 아직도 어린아이네요!
당신의 운명이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지요.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운명에 충실하면, 언젠가 그 운명은 당신이 꿈꾸는 대로
완전히 당신 것이 될 거예요." (199p)
에바 부인은 청년이 된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시간과공간사 클래식 시리즈 첫 번째 책, 《데미안》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나를 향한 목소리처럼 들렸어요. 우연히도 시간의 격차를 두며 데미안을 읽었는데, 이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네요!'라는 말이 쿵! 가슴을 쳤어요.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 없이는, 여전히 어린아이라는 걸... 여러 번 읽었으나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표면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네요.
헤르만 헤세는 1917년 9월과 10월 두 달 사이에 데미안을 썼고, 이 소설은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1919년 처음 발표되었어요. 본인의 이름을 숨긴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마흔을 넘긴 유명 작가보다는 무명의 젊은 작가가 자신의 고뇌를 녹여낸 작품이라서 유럽의 많은 청년들이 공감하며 읽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네요.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군 입대 대신 평화를 호소하다가 조국을 배신한 자,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어요. 당시 참전과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지식인들과 작가, 시인들은 전쟁을 옹호하며, 유명 시인들은 전쟁 시를 썼다고 하니, 동시대 우리 역사가 겹쳐져 보였어요. 일제강점기 시절에 친일문학활동을 했던 이들은 < 시 - 김동환, 김상용, 김안서, 김종학,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이찬, 임학수, 주요한, 최남선 / 소설 수필 희곡 - 김동인, 김소운, 박영호, 박태원,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장혁주, 정비석, 정인택, 조용만, 채만식,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 평론 - 곽종원, 김기진, 김문집, 박영희, 백철, 이헌구, 정인섭, 조연현, 최재서, 홍효민 > 이며, 항일문학가들은 한용운, 조명희,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송몽규, 이병기, 이희승, 김광섭 등인데 이분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하나같이 광복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어요. 해방 이후 반민특위를 해체한 이승만과 친일파, 이것이 대한민국의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짓밟으며 독재와 부패세력이 득세하는 출발점이자 한국현대사의 오점이 되었네요. 헤세는 전쟁의 비극을 외면한 채 오히려 찬양하는 지식인들에게 크게 실망했고, 비참한 심정으로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시대를 향한 목소리를 냈던 거예요. 당시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던 비주류 정신,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는 독일인의 미움을 받는 작가였기에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도 독일 국민들은 반기지 않았다고 해요.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수상 사유에서 "토마스 만과 함께 동시대 문학에서 독일의 문화유산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작가"라고 했는데, 바로 그 토마스 만의 '헤르만 헤세의 문학 세계를 기리며'라는 글이 부록에 실려 있어요. 토마스 만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이 격동의 시기에도 우리는 각자 끊임업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불행한 독일이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예견했고, ...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동행하는 순례자였고 형제였으며, 좀 더 적절히 표현하면 '동료'였다. 나는 우리 관계를 그가 쓴 『유리알 유희』에서 요제프 크네히트와 베네딕트 수도사 야코부스가 만나는 장면에 빗대어 생각하곤 한다. 이 작품에서 둘의 만남은 '인사를 끝없이 되풀이하고 깊이 존경한다는 뜻을 몸짓으로 보여주는 긴 의례'였다. ... 그는 독일어라는 언어로 가장 순수하고 섬세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가장 깊이 있는 예술적 통찰이 담긴 시와 격언을 빚어냈다. 그런데도 그가 독일 정신을 배반했다고? 그는 단지 숭고한 사상을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형식과 분리하려 했을 뿐이고, 자신이 속한 민족에게, 그들이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진실을 말하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민족이 자아도취에 빠져 저지른 악행이 양심을 뒤흔들었기에 그는 이를 외면하지 않고 으레 말해야 할 바를 말했을 뿐이다." (233-234p)라고 했네요.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도록, 결정적인 단서를 줬어요.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지금 떠나야 해. 크로머나 아니면 다른 일로 네가 나를 언젠가 다시 필요로 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런 날이 와서 네가 나를 불러도 나는 말이나 기차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오지는 않을 거야. 너는 네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네 안의 깊은 곳에 내가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야. " (231p)
삶의 진실, 우리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해답은 다른 어느 곳에 있지 않아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해요. 염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이 깨어 있다면 혼돈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게 될 거예요. 별을 사랑하게 된 어느 젊은이 이야기처럼 별과 하나가 되느냐, 산산이 부서지느냐, 우리는 선택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