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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를 만나다 ㅣ 푸른도서관 82
유니게 지음 / 푸른책들 / 2019년 3월
평점 :
"넌 지금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어. 설마 원근법이 뭔지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어느새 나는 남자 아이 앞에 다가가 있었다.
"그러면 왜 안 되는데?"
"그런 건 기본이야.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고."
"나 그러기 싫은데?"
남자아이가 그제야 나를 힐긋 보았다.
"이건 내 그림이잖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도리어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남자아이 조끼에 붙어 있는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신은하.
남자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무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일부러 방향을 틀어 그 아이를 등지고 앉았다. (41p)
<그 애를 만나다>는 작가 유니게의 청소년소설이에요.
주인공 민정이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평온했던 일상이 무너졌어요. 방에 있던 가구들과 소품들이며 옷가지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한 달 전, 민정이네 가족은 거의 빈손으로 외할머니 집에 들어왔어요. 가족... 아빠는 파산 직후 사라졌고, 오빠는 군대에 있고, 언니는 같이 이사를 왔지만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엄마는 방에서 두문불출, 끙끙 앓아누웠어요. 민정이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고, 다니던 학원과 화실까지 모조리 그만뒀어요.
민정이는 같이 화실에 다니던 승우오빠를 만나러 갔다가 화실에 다녔던 아이들 세 명을 만났어요. 그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울렸어요.
쟤네 집 망했대. 완전히 망했때. 어떡하니, 민정이 불쌍해서...... (30p)
민정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요. 억울한 감정...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냥 나 자신일 뿐인데.... 왜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을까...
외할머니 집 입구의 골목은 더 음침하고 남루해보였어요. 이 골목의 다른 이름은 절망이었어요.
그동안 엄마는 자식들을 명문 대학 보내는 것이 목표였어요. 오빠와 언니는 명문대 입학에 성공했어요.
민정이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처음에 엄마는 공부 안 하고 쓸데없는 짓만 한다며 야단치다가, 초등 4학년 여름방학부터 달라졌어요. 민정이를 화실에 데려갔어요. 아동미술부터 입술미술까지 가르치는 학원에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 실력이 늘었고, 엄마는 늘 민정이가 훌륭한 화가가 될 거라고 말했어요. 학교 대표로 미술 대회에 나가 수상할 때도 있지만 매번 받지는 못했어요. 그무렵 화실에는 민정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애들이 여럿 있었어요. 문득 대단한 화가가 못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손톱을 물어뜯었어요.
엄마는 민정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는 화실에 등록해줬어요. 이름난 미대에 들어가려면 그림만 잘 그려서는 소용이 없고, 성적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 화실은 모든 것을 관리해주는 곳이었어요. 게다가 정기적으로 교수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어요. 물론 아주 고액의 수강료와 함께.
그러나 지금, 아빠의 파산으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어요.
전학 간 학교에서 같은 반 신은하를 알게 됐어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남자아이, 걔 때문에 뭔가 속이 상했어요.
그리고 골목길 끝집에 사는 작은 여자이아 수아를 만났어요. 꾀죄죄한 차림의 수아는 엄마가 멕시코 남자랑 결혼했고, 곧 엄마가 자길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왠지 다 거짓말 같같았어요. 민정이는 수아를 보며 학교에서 거짓 부자 행세를 하는 자신을 본 것 같아 버럭 화가 났어요.
안타깝고 속상했어요. 하지만 민정이는 그 애를 만나면서 진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소설은 끝나도 민정이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작가는 <그 애를 만나다>를 통해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투영했다고 해요. 3년 전에 돌아가신 작가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희생으로 자식을 키우셨지만 자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셨대요. 늘 정답을 가진 어머니 때문에, 그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결국 그 정답은 어머니의 정답일 뿐, 나의 정답은 아니에요.
이제는 나만의 답을 찾아야 해요, 민정이처럼... 그 애를 만난 것처럼.
"... 진정한 성장이란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171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