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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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첫 단편집이라고 알고 있다. 인문서 냄새가 폴폴 나는 제목도 모자랐는지 각주까지 달려 있다.

처음에는 쉽게 읽히는 가벼운 소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읽어가는 사이 '작가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된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작품들. 개중 한두 편은 재미 없는 작품들이 꼭 들어 있어서 단편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이 소설집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의 사회 질서에 조용히 쓴웃음을 보내며 침을 뱉어주는, 그런 소설. 그래서 시원하고 통쾌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서글프기도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을 과장하고 위장하며,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ㅈㄹ 어이없고 ㅈㄹ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중잣대를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 여성의 입장에서 참 재미있고도 슬픈 책이 아닐 수 없었다.

"관습은 어느 시대나 저 편한 곳에서만 홀로 엄격하였다." 라는 작가의 말에 만배 그 이상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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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네 고만물상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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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꿈도 희망도, 강렬한 의욕도 없고, 억세게 재수가 좋은 것 같지도 않고 뭐하나 잘 하는 것도 없이 그저 그런저런 생활을 하면서 평범한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인생 뭐 있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는 따뜻한 위로를 주는 책이다.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위대한 영웅 같은 건 전혀 거리가 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사랑받으면서 그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일상을 맨송맨송 살아갈 뿐인 우리 보통사람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나카노네 고만물상’이 품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보통사람들 같은 ‘고만물’들이다. 길이길이 가치를 인정받을 골동품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는 처치 곤란한 잡동사니지만 또 일부에게는 아주 소중하게 사랑받는 물건일 ‘고만물’들.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취급하는 만큼 나카노네 고만물상에서는 잡다한 사연들이 펼쳐진다. 아주 소소한 얘기들이지만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섬뜩한 이야기들. 거기에 히로미와 다케오의 ‘사랑 같지 않은’ 사랑이 펼쳐진다. 이들의 사랑은 영화처럼 특별하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이 정말 구제불능인 ‘나카노 씨’는 은근히 매력적이어서, 다 읽고 나서는 그의 말버릇대로 “아니, 그게 말이야, 그게 엄청나게 재미있더라구.” 하고 말하게 되는 중독성이 강한 인물이다. 마사요 씨도 지지 않는다. 가끔씩 핀트가 어긋난 말들을 늘어놓지만, 살짝 핀트가 어긋난 이 말이 또 명언이다.

다 읽고 나서 살짝 미소가 지어지고 어쩐지 나도 나카노네 고만물상의 일원이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수상한 손님들의 갖가지 사연, 다 읽고 난 뒤에 맛본 행복감, 맛깔스러운 명언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소중히 여겼던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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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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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아무 것도 아닌 듯 던져놓는 말들 속에 어떤 깊은 고독감이나 외로움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편의점에 간다>가 좋았다.

남이 우리를 알은채 하는 것은 귀찮고 싫고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나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불안하다.

그 적당한 거리, 를 원하는 건 아닐까.

그 적당함은 매우 애매하고도 어려운 정도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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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나와 나 사이에 숨겨진 열두 가지 이야기
요시다 슈이치 외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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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요시다 슈이치를 좋아하는 나와 같은 독자를 겨냥했을 법한 "요시다 슈이치 외 지음"이라는 말에 끌려 얼른 구입했다.

책을 받아본 첫 느낌은 실망.

페이지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산 내 탓이 제일 크지만, 페이지도 적고 글자크기도 너무 커서.. 약간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읽어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또 실망.

일본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가다가다 영 이해가 안 가거나, 이해를 끊는 문장들이 종종 나왔다. 번역이.. 너무 거칠다, 는 느낌이었다. 날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조금더 체화해서 번역해주셨다면 조금더 감동적인 독서가 됐을 터인데.. 아쉬운 느낌이다.

1. 12명의 작가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작가의 특성을 느끼기엔 사실 너무 짧지만...)

2. 작가 사인이 인쇄되어 있다는 점

3. 짧은 시간에 한 권을 뚝딱 읽을 수 있어 지루하지 않다는 점

이런 점에서 별 세 개를 주고 싶다. (정말 후하게.)

(모리 에토의 <그녀의 남자의 특별한 날> 편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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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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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었던 기억은 있는데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겐 내가 하는 질문만 중요한 것일까. 애초부터 나는 상대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단지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 존재하는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도구 그 이상은 아닌 것처럼 상대의 대답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사카즈와 하야토의 대화도 그랬다.

"에이 참... 내가 말했잖아. 기억 안 나?" 마사카즈는 매번 하야토에게 묻는다. 두 사람은 같은 방에 기거하는 절친한(?) 회사 동료사이이다.

한편 블루칼라인 철근공 하야토와 화이트칼라인 설계사 이누카이. 이 두 주인공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보내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지만 모두 다 공허하긴 매한가지라는 듯, 각자는 나름대로 고독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매일 같은 일상들인데 읽고 있자니 묘하게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주인공에 어렴풋이 내가 겹쳐진다.

느닷없이 시작된 카운트다운을 의아해하면서 읽었는데 점점 그 템포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카운트다운의  끝에 만나게 되는 어떤 사건(여기서 밝히는 건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 하다)과 그 사건을 바라보는 냉정한 소설의 시선으로 책을 덮고 나니 잠시 멍해진다.(<퍼레이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먹먹해진다. 이리도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도 가볍게 그리다니. 그 맛에 요시다 슈이치를 읽는지도 모르겠다. 요시다 슈이치를 만나는 일이 계속 즐거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조금씩.. 천천히.. 깊숙하게 파고들어와 가슴에 휑한 구멍을 내고는, 너무도 빨리 스윽 빠져나갔다. 그 동공을 메우는 것은 마치 네 몫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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