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득재 지음 / 소나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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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의 레디컬함에 끌렸다. '야만'조차 포옹해야하는 가족이라는 '情의 도가니'가  '-주의'를 꼬리 붙였다 해서  '야만'으로 둔갑하다니? 유쾌하지 않은가? 이 발칙함에 지지를 보낸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될 공적 역할을 개개 가족에게 전가하면서 '사회'의 영역이 사라진 '가족=국가' 형태의 국가 체제에 야유와 비판을 쏟아낸다. 인간세의 마지막 보류인 냥 '가족 사랑'을 설파하면서 그 가족은 항상 '남성가장'을 통해' 대리 통치된다. 그리고 이 가부장제가 국가 전체의 설득력 있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면서 '가족같은 회사' '아버지 같은 선생님'  '아버지 같은 대통령'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회사의 위기는 곧 가족의 일원인 나의 위기가 되고, 나라의 위기는 곧 나의 위기가 되어 스스로 회사와 국가에 기꺼이 봉사하는 '마조히즘'의 국민이 되고 있다.

직면한 이라크 파병을 보더라도 국가는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파병의 불가피성을 얘기 한다. '국익손실'  '북의 위협' '미국의 힘' '에너지문제' 그러나 구체적인 언어와 근거로 그 위협의 실체를 말하지 못한다. 막연한 공포와 위험만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힘에 짓눌린 우리는 '마조히즘'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것 아닐까?

작가가 거론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지식 없이 읽었기에 제대로 소화를 못시킨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작가가 충분히 익어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데 막힘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썼는지 의심이 간다. 인용이 주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과 동어반복의 설명이 시종일관 이어진다. 작가가 부친 제목들만 빛이 난다. 설익은 밥을 왜 내가 먹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어젯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말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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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믿음의 글들 40
우찌무라 간조 지음, 양혜원 옮김 / 홍성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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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다.  농업대학 시절(10대) 친구들과 종교를 매개로 한 순수함. 열정. 우정은 시종 미소를 짓게 한다. 아이들의 꾸밈없는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명랑함이 전해진다.

미국 유학에서  '하느님이 선택한 나라' 의 야만성에 '과거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며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절 '박애'를 바탕으로 깊은 신앙심을 실천하며 편협함이 없는 분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감동을 준다. 조국을 비하했던 생각들과 기독교 나라의 빛과 어둠의 괴리감에서 벗어나  '복음'의 설렘을 갖고 조국으로 돌아 온다는 20대 후반까지의 회심의 기록이다.

부분부분 수긍하기 힘든 곳도 있다. 크리스찬이 아닌 독자의 한계니 어쩔 수 없다 싶다.그러나  여성존중을 비난하는 점. 이교의 나라들을 '열등 인종' 이라 표현하며 선교를 통한 '정복'을 강조 하는 점. 세상은 하나의 단일체이며 가족이고 남을 완전케 하지 않고 서는 자신도 완전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외부로의 성장을 역설하는 점은 지나친 교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피비린내를 일으키지 않았나?  물론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다 불의를 받았지만 .

 오늘날  '선민의식'에 빠져 하느님과 너무나 멀어진 일부 교회와 기독교인 그리고 열정이 식은 종교인이라면 읽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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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여자 박완서 소설전집 1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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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들이 너무나  정형화되어 있고, 시각이 고루하다는 씁쓸함에 책을 읽다가 초간 연도를 보니 95년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작품연보'를 보니 1982년에 [떠도는 결혼]으로  먼저 발표 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럼, 그렇지.... 오해를 좀 덜어낸다.  '여성'에 대한 담론은 10년과  20년의 차가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근본적 문제'라는 것은 거의 변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문제의식'과 사회와 남성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여성 스스로의 '자아관'  '자존감' 만큼은 많은 변화가 있다고 본다.

 '연희'와 그의 엄마 '경숙'의 결혼 생활은 언뜻 보면 남편과 인습에 '독립'과  '의존'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듯하지만 우리 사회와  남성들이 내심 바라 맞이않는 '아내'의 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인생이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경숙이 주입된  여성관에 기꺼이 동참하는 '길들여진  남성' 이라면, 연희는 주입된 여성의 삶에 몸서리치며 결국 결혼에 있었어도  '사랑' 보다 '남녀평등'에 더 가치를 부여하며 '독립된 여성'으로 살고자 한다.

경숙이 이혼으로 가지 않은 것은 애초에 그런 의지도 없었거니와 친구들의 이혼 모습에 낙담했기 때문이다. 소위 잘 나가는, 돈 많고 직업 번듯한 이혼녀들은  남편의 부재가 인생의 결정적 결함이 되고 있다. 또 연지가 만난 여권 운동가는 사회적 성공과 집안의 행복을 바꾼 가해자이며, 유일하게 행복한 모습으로 언급된 여성은 남편의 사랑과 존중을 받으며 내조에 헌신한 연극인의 아내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시각이 은연중 개입된 듯하다.  내로라는 여성들의 성공에 숨은 허위와 가식을 꼬집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사회에서 받았을 상처와, 힘겨웠을 뒷면은 왜 보지 않는지,  여성의 신성한 의무는 가정에 있다고 유전자에 박혀 있는지....위 세대의 이런 시각이 오늘날  '슈퍼우면 컴플렉스'를 심어준게 아닐까?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독신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무장한 전사가 되게 하는 게 아닐까?

연지의 남편 같은 남자, 슬프게도 흔하고 흔하다.  남자는 공부 중이거나 구직 중이고 여자가 경제를 떠 안고 있다.  물론 여자 쪽에서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결혼들이다. 그러나 결혼 전의 가사분담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남자는 없다. 치열하게 싸우기도 전에 대부분은 여자가 먼저 포기한다. 여자 스스로 가사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 보다 주입된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고무장갑 끼고 주방에 있을 때면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하던 백수 남자의 말과 때론 황당하게 당당하던 여자는  '남편 기죽이기 싫어서'라며  번 돈으로 정말 기죽지 않게 하려고 비싼 옷에 출퇴근하는 자신의 경차는 버리고 남편에게 중형차를 사 주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내, 남편, 엄마 ...이전에 행복해야 하는 고유한 인격체이며, 자유롭게 관계하고 사랑하며 이해 받을 권리가 있는 인간이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빛갈을 잃지 않므며 살기 위해서는 독립된 개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 개인들의 에너지가 모여야 우습지도 않은 신화의 벽을 우습게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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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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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한다. 꽃의 빛깔과 향기가 아무리 고와도 순간이다. 순간을 향유하고 미래를 열어두고 가지만 시든 꽃은 쓸쓸하다. 꽃처럼 아름다운데 시들지 않는 것??? 별이 아닐까...신영복 선생은 '별'같다.  밤이지만 두려워 숨지 않고 오히려 빛을 낸다. 별은 꿈꾸는 사람의 친구다. 

20년 2개월을 감옥 산 사람에게 별이니, 아름답다니 하는 것이 외람되지만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그가 감옥에서 쓴 글들을 보며 존경과 감동을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다. 20년을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는 비탄에 빠지거나 원망이 없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지도 않는다. 절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무기징형'의 절망적 시간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무서운 의지로 자신을  달구었기 때문일 것이다.

20년은 사색의 시간이었으며  같은 '수인'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창녀촌의 노랑머리' 이야기와 '문신'한 사람들을 보며 가지는 생각들은 내게도 울림을 준다. 그가 가장 안타까워 하는 것은 자신의 인식이 실천으로 옮겨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한 다리의 불구로 비유하기도 한다. '세상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말씀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과거를 회상한 '청구회 추억'은 따뜻한 동화를 읽는 듯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가족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범위가 부모님. 형님내외. 동생내외와 조카들이다. 그에겐 두 분의 누님이 계시다. 한두 번 언급되었을 뿐인데 항상 ' 출가외인'이란 말을 쓰신다.  계수와 형수에게도 자상한 애정과 감사를 보내는데  그의 가족관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틀을 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혈육의 정으로 보더라도 안타깝고  집에서 내 위치가 '누이'인지라  글을 읽으면서 퍽이나 안타까웠다.

선생이 출감 후 쓴 글을 한 권 더 읽어야 겠다. 그런데 한편으론 읽기가 좀 두렵다. 혹  현실을 열려있는 감옥이라 생각하실 것 같아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비극! ....아니, 깊고도 단단한 분이니  현실의 절망을 통해 또 다른 사색과 희망을 엮어 나갈 것이다. 선생이 행복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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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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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100 번째 리뷰를 쓰고 있다. 주위 노통 신자들의 복음을 받고도 한참 망설이다가  후덥지근한  밤에 얼음을 500cc 잔에 꽉 채워 '와자작~' 깨 먹으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주문했는데 입 안만 얼얼하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 책을 앞에 두고 리뷰를 쓰자니 더워진다.

내부의 모습이 곧 외형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수시로 악마와 천사와 짐승의 몰골을 바꿔가며 때론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입체파 화가들의 창작열에 신나를 뿌리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머리싸매게 할 것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꽤 명쾌하리라. 그러나 두 가지 얼굴이 아니라 수 천개로 출아하는 히드라처럼 생명체를 형성해 나가는 나는 수 천개 히드라의 종합세트 일 수도 있다.

"내가 적의 존재를 믿는 것은, 밤낮 할 것 없이 내 삶의 길목마다 그것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그 적은 화장을 한 자아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존해 온 적들을 뛰어 난 화장술로 변장시켜 필요에 따라 불러 낸다. 아니 불러 내지 않아도 그들은 스스로 활동을 한다. 어쩌면 그 적이 나를 불러 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을 면죄부처럼 중얼대지만 책임 소재는 참으로 억울한 것이다. 우리의 공식 얼굴은  하나 이므로 나는 나를 대표해햐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말해도 개운하지 않는 것은  우리는 배 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싸고 졸리면 자고 때되면 생산하는 '짐승'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형상 속에는 짐승도 있지만 '신'의 모습도 분명 존재한다. 

신의 눈으로 인간을 볼 때는  섬세해야한다.  따뜻해야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쾌감은 '신'이라는 절대 권력을 잔인하게 행사하는 즉 인간을 도구화 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구원'과 '화해'에 대해 '신'의 눈길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을 '타락천사' 라 생각하는 신과  '가면의 신' 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그는 우리 속의 짐승을 불러내어 서로를 바라 보게 한다. 그러나 그 바라보는 군중 속에는 신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상처  받고 있는 약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시시콜콜 생각 하지 않는다. 그저 양육강식의 짐승만 있을 뿐이다.

엇나갔다. 암튼 이 책은 까불지 마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적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안녕'을 말할 때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인사를 할 것인지 색색의 화장을 하고서 적들과 함께 퇴장 할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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