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100 번째 리뷰를 쓰고 있다. 주위 노통 신자들의 복음을 받고도 한참 망설이다가  후덥지근한  밤에 얼음을 500cc 잔에 꽉 채워 '와자작~' 깨 먹으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주문했는데 입 안만 얼얼하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 책을 앞에 두고 리뷰를 쓰자니 더워진다.

내부의 모습이 곧 외형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수시로 악마와 천사와 짐승의 몰골을 바꿔가며 때론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입체파 화가들의 창작열에 신나를 뿌리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머리싸매게 할 것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꽤 명쾌하리라. 그러나 두 가지 얼굴이 아니라 수 천개로 출아하는 히드라처럼 생명체를 형성해 나가는 나는 수 천개 히드라의 종합세트 일 수도 있다.

"내가 적의 존재를 믿는 것은, 밤낮 할 것 없이 내 삶의 길목마다 그것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그 적은 화장을 한 자아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존해 온 적들을 뛰어 난 화장술로 변장시켜 필요에 따라 불러 낸다. 아니 불러 내지 않아도 그들은 스스로 활동을 한다. 어쩌면 그 적이 나를 불러 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을 면죄부처럼 중얼대지만 책임 소재는 참으로 억울한 것이다. 우리의 공식 얼굴은  하나 이므로 나는 나를 대표해햐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말해도 개운하지 않는 것은  우리는 배 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싸고 졸리면 자고 때되면 생산하는 '짐승'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형상 속에는 짐승도 있지만 '신'의 모습도 분명 존재한다. 

신의 눈으로 인간을 볼 때는  섬세해야한다.  따뜻해야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쾌감은 '신'이라는 절대 권력을 잔인하게 행사하는 즉 인간을 도구화 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구원'과 '화해'에 대해 '신'의 눈길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을 '타락천사' 라 생각하는 신과  '가면의 신' 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그는 우리 속의 짐승을 불러내어 서로를 바라 보게 한다. 그러나 그 바라보는 군중 속에는 신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상처  받고 있는 약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시시콜콜 생각 하지 않는다. 그저 양육강식의 짐승만 있을 뿐이다.

엇나갔다. 암튼 이 책은 까불지 마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적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안녕'을 말할 때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인사를 할 것인지 색색의 화장을 하고서 적들과 함께 퇴장 할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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