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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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이 온 날 1시간쯤 훑어 보았다가 두고는 한참이 지나 다시 꺼내 읽었다. 충실한 독서는 아니었다. 그의 사유 세계를 쫓아 간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첫 날 간파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았다. 물론 어떤 책인들 독자인 내가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단지 나는 '열정'만은 작가와 공유하고 싶다. 작가가 미친 듯 쓴 부분에서는 나도 미친 듯 빨려 들어가 읽고, 담담하게 쓴 부분은 나도 담담하게 읽고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것도 어려웠다. 죽음을 예감하고 유작을 염두했기에 세세한 직설적 감정은 좀 걷어 낸 듯한 건조한 일기가 되어버린 아쉬움도 있다. 

20살쯤의 일본 철학도가 쓴 일기를 본 적이 있다. 당시의 내 나이와 동갑이었는데 하루 하루가 철학적 사유의 기록이었으며 실천의 시간이었다. 헤겔 철학도 답게? 침략 중인 일제의 군국주의를 지지하는데서 뜨악했지만 지적 인식의 세계가 생활인 사람이 있구나 하는 충격이 컸었다. 그 후로 두 번째의 같은 충격을 이 책에서 받았다. 문학이론을 비롯한 온갖 주변의 세계를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그것보다 직업으로서 읽고 쓰고 비판적 사유를 하는 평론가가 아니라 그것이 생활, 삶, 존재 자체인 것에 놀랍다.

한 가지 좀 아타까운 것은 충분히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터인데, 일기니 만큼  자유롭게, 읽은  작품을 갖고 놀아도 될 것 같은데 왜 그리 경직되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읽을 만하다.'  '잘 만들었다' '재미있게 읽힌다' 로 밖에 감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훤하게 안다는 것이 순수한 재미를 빼앗아 가게 했거나 아니면 작가들의 창작물을 쉽게 대할 수 없는 존중과 관심 때문이었을까? 

흥 맞춰 같이 노래 못하고 구경만 한 듯한 아쉬움이 남지만  작가가 이른 죽음을 예감하면서 이 정도 담담할 수 있는 것, 처연하고도 부럽다. 인식의 세계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모습은  내 것이게 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의 계급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지식인의 현실과 이상의 겉도는 모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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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잃어버린 기술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전병욱 옮김 / 쉴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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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쇄 살인범으로 인해 사형제도 존폐 문제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몇몇 의원들이 폐지를 발의 한다는데 가능할까 싶다. 교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오직 '응징과 추방'의 감정만 남은 이런 흉악범들을 둘러 싼 용서의 문제를 실화로 다루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이 생각난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잔인하게 살해한 사형수는 회개하여 영적평화를 누리지만 증오로 미쳐가는 부모의 이야기. 보통 인간들도 갖지 못한 지고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자다. 천국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와 지옥에서 살아 가는 부모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용서가 가해자까지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피해자인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리라. 증오는 복수의 성공과 가해자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잔인하게도, 상처받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고통 속에서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분명 진화다. 사람이 경험의 시간을 통해 서서히 성숙해가는 것도 기적같은 일지지만 단번에 내면적 업그래이드의 기회는 이런 고통 속에서 주어지는 것 같다. 용서란 자격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가해자의 변화와 무관한 것이라 한다. 끔찍한 고통으로 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하며 나를 파괴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용서라 한다. 그래서 용서는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빛만이 어두을 몰아낼 수 있다.' 한다. 분노, 화, 정의를 표현하되 용서의 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읽으면서 '이론은 아름답구나' 하는 시니컬함도 들었고 내 함량으로 봐서는 극한 고통 속에서 용서가 가능할거 같지는 않다. 망각과 분노의 에너지가 분산될 시간을 믿고 견디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용서가 아닐까  그러나 이 책은 종교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종교.... 내가 가지지 못한 거대한 힘이다.  물론 종교와 상관없이 '용서'라는 말 자체가 상대를 향한 개념이며 주체적 힘을 전제로 한다. 책의 부제에서 보듯이  '잃어버린 기술' 이다. 내 속에 기생하고 있는, 아니 내가 양육하고 있는 짐승의, 어둠의 세계를 인정한다면 '용서'는 영원한 우리의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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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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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양심적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설득력있는 주장을 매체를 통해 활발히 하는 모습을 봤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이분을 통한 역사를 보고 싶었다.

알고 있는 역사는 일단 의심하며 휴지통에 던지고 새로 역사를 알아가거나 아니면 그냥 백지 상태로 비워둬야 한다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일 것이다. 요즘 역사교과서는 좀 다르리라 희망해 보지만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이 누군지 교육계에서 큰 소리내는 세력이 어딘지 생각해 보면 국정교과서에 대한 의심은 계속 되어야 할 것 같다.

나 개인조차 결코 단순하지 않듯 역사 또한 모순적 양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호도하여 행한 결과는 역사의 긴 흐름에 결코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없다. 그 처벌에 단호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드러내는 일에는 조금의 누락도 없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선진국들의 근현대사도 피의 역사다. 우리 또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를 끝내지 못하고 근대의 모순을 그대로 떠 안고 있다. 인권의식은 공유되고 있지만 인간취급받는 사람은 항상 강자다.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항상 2등 시민으로 뭔가에 눌려 있는 듯한 소외된 소시민으로 스스로를 내면화 한다는 것이 나만의 착각일련지......2만불 시대를 바라보는 풍요 속에 정작 중요한 자긍심. 자존감은 빠져 있는 듯 하다. 고문치사와 민간인 학살 부분을 읽으며 읔~ 하고 토할 것 같았다. 구토를 일으키는 역사가 우리의 권력에 의해 행해지고 지금까지 그 억울함을 온당히 호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행복하기란 멀고 책임은 무겁다.

일제가 미제로 바뀌고 친일 기득권 세력이 미제 기득권 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이 나라의 온갖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청산 못한 역사는 생각보다 더 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며 이 나라를 뒤틀고 있다. 그러나 희망을 갖는다. 자유로운 젊은 세대가 있다. 눈치보지 않고 당당한...... 그들이 자본의 힘에 너무 깊숙이 말려 들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과거사에 대한 청산과 진실을 밝혀 햇빛으로 끌어내어야 한다. 2만불이나 통일보다 더 시급한 우리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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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나눈 이야기 1 - 나는 너희가 원하는 걸 원한다, 개정판 신과 나눈 이야기 1
닐 도날드 월쉬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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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월쉬의 말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간 것이 10살 쯤이었다. 목사님이 어떻게 설교하고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이 신의 음성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3일 동안 온통 이 책에 신경이 가 있었다. 집에 달려와 샤워를 하고 얼음 물 한 잔을 갖다 놓고 신과의 면담을 시작했다. 신은 시종 유쾌하고 수다스럽고 친절하다. 기독교인을 위한 책도 비기독교인을 위한 복음서도 아니다. 자신에게 심드렁해져 있다면 충분한 임파워먼트가 될 수 있을 책이다 . 아래 리뷰를 보니 밑 줄 쫙 그으며 읽었다는데  카드 쫙 긁는 능력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머니 신도들에게도 냉정하지 않다. 위엄, 훈시, 예언, 진리..... 정말 너무 카리스마 없는 신이다. 신의 관심사는 오직 '나'이다. 자신을 무지 사랑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나. 행동이 먼저인 나. 내 영혼이 나를 지배하는 나.  영혼이 진화하는 나.  이런 나의 생각이 우주에 넘치길 바라는 신. 그래서 내가 신이 되길 바란다는 신. GOD you are! 라는 신......2. 3권을 함께 주문하지 않았다. 의심했으니까. 그리고 이 책을 강추한 깨닫은 자 임을 자칭하는 ㅅ씨를 알딸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머지 2.3책들을 어여 읽고 싶다!' 이 한마디로 리뷰를 끝내도 좋을 만큼 나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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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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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처음 이 책을 본 것은 초등 6학년 때. 반마다 학급문고에는 책들이 제법 꽂혀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우리 반에는 책이 없었다. 앞문 옆 빈 책꽂이에 쓰러져 가는 초가같은 몰골로 이 책이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누렇다 못해 흙빛에 가깝게 바랜 종이와 찢어져 매달려 있는 청색 하드보드 표지의 [고도를 기다리며] 는 초라하고 이상한 책이었다. 앞 몇 장을 읽다  제 자리에 두고 또 눈이 가는 날 몇 장 읽다 말기를 반복하다 끝내 끝을 보지 못했다. 이상한 두 남자가 지루하고 답답한 대화같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는 이야기로 기억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읽으며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시간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남자가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에 같은 이야기 같은 희망으로 반복하듯 사는 것이 단물 빠진 껌을 박자 맞춰 씹고 있는 일같이 비루하다는 것을 절절히 보여준다. 고작 구두를 벗는 일에나 힘을 쏟으며 자살조차 희극적으로 불발이 되고  과거를 기억하고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인물이나 기억하지도 못하는 인물이나 그물망 안에서 힘없이 눈을 뜨고 있는 비릿한 삶은 똑같다.

 타자와 자아 시공간 마저 무분별하고 죽음도 내 뜻대로가 아니라면  작가가 말하는 '고도'란 무엇일까??고도가 필요하기나 한 건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도나 기다림이 아니라 지금 순간을 명료하게 살아 있는 것이리라.  고도가 오든 안 오든, 고도의 의미가 무엇이든 삶의 이유는 순간에, 일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인물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란 씁쓸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인물 옆에 내가 서 있다해도 내용이 달라질 건 없을 것같다.

 이 책이 주는 삶의 페이소스가 비극적이라면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는 쿨했다. 시어 털떠름할 망정 단물의 추억이 있는 푸른 사과가 아닌가. 그러나 딱딱하고 질긴 바게트 같은 삶을 씹으며 달고 빨간 사과의 고도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비극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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