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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조금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처음 이 책을 본 것은 초등 6학년 때. 반마다 학급문고에는 책들이 제법 꽂혀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우리 반에는 책이 없었다. 앞문 옆 빈 책꽂이에 쓰러져 가는 초가같은 몰골로 이 책이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누렇다 못해 흙빛에 가깝게 바랜 종이와 찢어져 매달려 있는 청색 하드보드 표지의 [고도를 기다리며] 는 초라하고 이상한 책이었다. 앞 몇 장을 읽다 제 자리에 두고 또 눈이 가는 날 몇 장 읽다 말기를 반복하다 끝내 끝을 보지 못했다. 이상한 두 남자가 지루하고 답답한 대화같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는 이야기로 기억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읽으며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시간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남자가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에 같은 이야기 같은 희망으로 반복하듯 사는 것이 단물 빠진 껌을 박자 맞춰 씹고 있는 일같이 비루하다는 것을 절절히 보여준다. 고작 구두를 벗는 일에나 힘을 쏟으며 자살조차 희극적으로 불발이 되고 과거를 기억하고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인물이나 기억하지도 못하는 인물이나 그물망 안에서 힘없이 눈을 뜨고 있는 비릿한 삶은 똑같다.
타자와 자아 시공간 마저 무분별하고 죽음도 내 뜻대로가 아니라면 작가가 말하는 '고도'란 무엇일까??고도가 필요하기나 한 건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도나 기다림이 아니라 지금 순간을 명료하게 살아 있는 것이리라. 고도가 오든 안 오든, 고도의 의미가 무엇이든 삶의 이유는 순간에, 일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인물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란 씁쓸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인물 옆에 내가 서 있다해도 내용이 달라질 건 없을 것같다.
이 책이 주는 삶의 페이소스가 비극적이라면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는 쿨했다. 시어 털떠름할 망정 단물의 추억이 있는 푸른 사과가 아닌가. 그러나 딱딱하고 질긴 바게트 같은 삶을 씹으며 달고 빨간 사과의 고도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비극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