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내 귓가에 초기화중에는 절대 통화를 하지말라는 피에로의 경고가 다시 벼락처럼 들려왔다.
“85%라, 그냥 허망하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똥줄이 타는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굳이 휴대폰의 초기화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주변을 정신없이 헤맸다.그러나 요즘처럼 개인 휴대폰이 일반화된 시대에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않고 미친 놈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점점 시간에 쫓기게 되자 나는 다시 휴대폰을 사용하고싶은 강한 유혹에 다시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견디어냈다. 마침내 나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어느 으슥한 골목의 슈퍼 앞에서 낡아빠진 공중전화 박스를 간신히 찾아냈다.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움켜쥔 나는 정신없이 사무실 전화번호를 눌러댔다.마감 1분 전이었다. 나는 신호음이 떨어지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야차와 같은 오부장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 제가 공유 드라이브에 자료를 올리는 것을 깜박했거든요”
“뭐, 뭐야 ,그것을 왜 이제 이야기 하는거야!”
“공중전화를 찾다보니까 늦었습니다.”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너 회사 말아먹으려고 아주 작정한 거지?”
“죄…..죄송합니다. 그보다도 빨리 그 자료를…….”
“나도 몰라 , 이미 벌써 마감 시간이 지났잖아!”
“부장님, 제발 저좀 살려주세요.”
“에잉, 전산실에게 네가 직접 이야기해!”
“부장님, 제발,”
나는 거의 울상이었다.나의 보고를 받으면서 이미 오부장이 전산실에 손을 쓰고 있으리라고는 추측은 했지만 나의 불안감에 극도에 달했다.
“너 이번에도 휴대폰 안 사면 죽을 줄 알아!”
“알,,,,,알겠습니다.”
나는 최악의 전산사고를 막아야한다는 절박감에 거의 죽는 시늉까지 해야했다. 나는 그날 휴대폰을 제 때에 쓰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을 당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있음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하루에도 몇번이나 숨겨둔 휴대폰을 무심코 꺼내어 쓰려다 깜짝 놀라서 그만두곤 했다. 정말 그건 살을 깍는 듯한 고통스런 수행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불통화 기간이 96일까지 다다랐다. 액정에 새겨진 숫자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마치 아름다운 첫날밤을 맞기 위해서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순결을 굳게 지켜온 처녀의 고운 마음처럼 두근거렸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고지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는 병사처럼 나는 결의를 다시 다졌지만 마침내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으면 결정적으로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다.
그날은 마침 휴일이라 아내몰래 문제의 휴대폰을 주머니속에 깊숙이 숨기고 역전에 있는 백화점으로 쇼핑을 나갔다.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도 감상하고 난 후 나는 지하 음식점 코너에 들려 가볍게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식탁에 잠시 내려놓은 휴대폰의 액정에는 97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
새삼 감회에 젓듯이 숫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건물 천장부분에서 뭔가 부러지는 듯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건물이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맞은 편의 천정부분이 힘없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음식점 코너는 놀란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던 나에게 매캐한 시멘트 가루가 폭풍우처럼 밀려왔다. 그 바람에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사방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나는 무너진 건물의 기둥이 벽에 비스듬이 걸리는 바람에 생긴 조그만 공간속에서 가벼운 생체기만 입은 채 갇혀 있었다. 깊고 깊은 바다속에 빠져버린 듯한 절망감에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 살려!”
그러나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깊은 암흑으로 변해버린 음식점 코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밖에서는 대형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난리가 났을텐데도 말이다. 너무나 고함을 질러 기진맥진해버린 나는 구조요청을 잠시 포기하고 시무룩하게 잠시 침묵을 지켰다. 다시 익숙치 않은 거대한 암흑이 죽음의 공포를 몰고 왔다. 나는 다시 발작적으로 건물더미를 헤쳐내려고 발버둥쳤다. 그렇지만 그 바람에 다른 건물의 잔해가 조그만 공간으로 우수수 쏟아지는 바람에 나는 질겁을 하고 그만 포기해버렸다.
나는 이렇게 어이없이 죽는가?
그때 어디선가 아련히 휴대폰 소리가 들렸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처럼 건물더미에 깔린 어느 희생자의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같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애절한 벨소리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의 주인은 이미 사망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 휴대폰!”
나는 허겁지겁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텅빈 주머니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그때서야 붕괴사고가 나기전에 식탁에 휴대폰을 올려놓은 것을 깨달고는 미친듯이 주변 바닥을 더듬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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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규환의 난리통에 휴대폰은 어디로 쓸려갔는지 도무지 찾을수 없었다.다시 한번 밀려오는 절망감에 입술이 타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한치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을 마구 뒤지고 있을 때 뭔가 묵직한 것이 손에 잡혔다.황급히 집어보니 느낌이 휴대폰같았다. 지체없이 폴더를 밀어올리니 액정에 새겨진 98이라는 숫자가 환하게 맞아주었다.나는 거의 하루 동안 기절해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살았다.”
자그만한 액정의 파란 빛이 주변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밝혀주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두터운 어둠속에 갇혔던 나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나는 별세계에 다시 태어난 듯 싶었다.
그런데 휴대폰의 건전지가 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간당 간당한 건전지가 소모되기 전에 외부의 구조대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야 했다.
“……!”
그런데도 지랄맞게도 나는 또 망서렸다. 또다시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지말라는 금기사항이 악령처럼 떠올라 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때 휴대폰의 초기화는 98을 육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이틀만 참으면 내가 그토록 소망했던 애인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 이틀만 참으면 되는데……”
나는 그때 정말 이상하게도 최면의 걸린 사람처럼 휴대폰의 번호를 차마 누를 수 없었다.내가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을 때에도 다른 사망자들을 찾는 휴대폰 소리들이 어둠속 저 너머에서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에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나의 가슴은 그것에 대답하고 싶은 듯 격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
그 많던 사람중에서 나만 살아 있었다. 다시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에 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다행히도 휴대폰이 있어 구조요청만 하면 살아날 희망이 아직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시 나는 아무 생각말고 바깥 세상의 구조대에게 빨리 나의 위치를 알려야 했다.
하지만 생존욕구가 폭포수럼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만 더 구조의 손길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휴대폰을 굳이 쓰지않고도 하루만에 운좋게 구조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갈망했던 구조의 손길은 좀처럼 나에게 다가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지금쯤 바깥 세상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을텐데 왜 이리 구조활동이 마냥 더딜까. 나의 마음은 차츰 초조해지고 절망에 빠졌다. 아마 대형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잔해를 치우는데에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어 막상 생존자들을 구해내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지도 모른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더 이상 생존자를 찾는 휴대전화 벨소리도 들려오지도 않았다. 외부에서는 건물더미속에 더 이상 생존자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휴대폰이 없는 것으로 인식된 나에게는 아무 전화도 오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지금 붕괴현장의 지하실 바닥에 힘없이 누워 있는 것을 꿈에도 모르리라. 그저 왜 남편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나 하고 걱정하고 있겠지.
어느 순간 극심한 배고픔이 나의 작은 육체를 휘감고 뒤흔들었다.주린 배를 움겨잡던 나는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은 휴대폰도 마찬가지 는 것을 깨달았다. 억겁의 어두움이 두려워 계속 휴대폰을 켜놓은 탓에 건전지는 급속하게 소모되어갔다.
“도대체 내가 왜 애인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
애인도 살아있을 때 애인이지 지금처럼 죽음의 문턱을 들낙거리는 순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것이 속물적인 욕망을 취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필요없었다. 그런 마음속의 갈등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갑자기 윗부분에서 ‘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게 놀라며 휴대폰으로 위를 비춰보자 침침한 액정빛속에서 건들거리는 콩크리트 덩어리가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어른 크기만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외부의 진동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바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는 크레이나 굴삭기들의 무게 때문에 콘크리트 덩이어리가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그런데 간신히 매달려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검은 물체가 착 달라붙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번쩍이는 두 개의 유리알은 분명 살아있는 생물체의 것이었다.그것은 그네를 타듯이 콘크리트 덩어리에 힘을 주면서 나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래. 죽고나면 그깥 애인이 다 무슨 소용이야. 빨리 살려달라고 전화를 해! 이 날카로운 돌덩어리가 네 머리통을 짓이기 전에 말이야!히히히,”
소름끼치게 웃어대는 그놈은 분명 죽음의 사자였다.혼비백산한 나는 섬찍한 죽음의 사자를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휴대폰의 폴더를 열었다.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나는 굶어죽기 전에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깔려 처참하게 죽을 판이었다. 빨리 외부에 전화를 걸어 나의 위치를 알리고 더 이상 콘크리트를 흔들리지 말라고 호소해야 한다.
잘 생각나지 않는 아내의 전화번호를 상기하며 첫번호를 누르는데 휴대폰에서 삐삐 하고 경고음이 들렸다. 액정의 오른쪽 구석에 있는 밧데리 소모를 나타내는 칸이 거의 비워지고 윤곽만 희미하게 나타났다.갑자기 머리칼이 번쩍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허둥대다가 간신히 아내의 번호를 다 눌렀다. 이제 통화 버튼만 누르면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액정의 숫자가 98에서 99로 스르르 바뀌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다시 붙잡는 최후의 메시지가 그 밑에 나타났다.

“이제 하루가 남았습니다. 숨겨진 애인을 찾는 작업을 정말로 중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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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침 출근 하려던 나에게 아내가 갑자기 물었다. 원하다면 아내에게 자수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 아니,”
나는 주머니속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땄다.
“ 벌써 찾아갔어?”
“응,”
“이삼일 후에 찾으러 온다고 그랬잖아요?”
불현듯 의심이 드는 듯 아내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진다.
“그랬는데 어제 저녁에 부랴 부랴 사람을 보내서 찾아갔어.”
“그래요? 휴대폰 주인이 고맙다고 안해?
“나중에 자기가 올라와서 직접 사례하겠대. ”
“말로 때울 작정이야.”
“좀 인색하더구먼. 그런데 그 휴대폰은 왜?”
나도 아내의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피며 되물었다.
“내 휴대폰 건전지가 마침 죽어버려서 그것 한번 사용해보려고 그랬지.”
“남의 것 좋아하지마! “
“최신제품 한번 써보려고……”
“그래도 쓰던 것이 좋은 법이야.”
“알았어.”
태연하게 내뱉는 나의 훈시에 눌려 아내는 슬그머니 물러갔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나의 입체휴대폰이 아내에 의해서 사용될 뻔한 첫번째 위기(?)는 잘 넘어갔다.
나는 일단 아내에게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거짓말을 했으로 이제 그 휴대폰은 절대 그녀의 눈에 띠면 안되었다.
나는 한참을 궁리한 끝에 휴대폰을 회사 사무실의 서랍속에 감추어두기로 했다. 사무실은 일단 아내의 손이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였으니까. 그래도 회사 사람들 눈에 띄일까봐 외근을 나갈 때에는 휴대폰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
그동안 휴대폰의 액정에는 초기화가 진행되는 일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매일 바뀌어 갔다. 그와 더불어 나의 기대감도 덩달아 부풀어져 갔다.나는 마치 지갑에 복권 한 장 을 사서 담고 다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한 기분에 하루 하루가 즐거웠다. 나중에 설사 꽝으로 판명되어도 그동안 행복했었던 것으로도 좋았듯이 휴대폰도 지금 나에게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사무실도 그리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 곧 판명되었다. 어느날 내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자 직장 동료 김계장이 내 자리에서 앉아 있다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불쑥 말한다.
“이야, 오계장, 휴대폰 언제 마련했어?”
“무슨 휴대폰?”
나는 속으로 뜨악했지만 최대한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김계장은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내 책상의 서랍을 슬쩍 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내가 은밀히 감춰두었던 휴대폰이 겸연쩍게 모습을 드러냈다. 김계장이 자기 컴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내 책상에 잠깐 일하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새로 샀으면 즉각 신고를 했어야지. 전화 번호가 몇번이야? 아니지. 나한테 걸어봐라.”
김계장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들고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찌할지 몰라 잠시 당황하던 나는 궁여지책으로 대꾸했다.
“이 자식아, 이건 우리 와이프 휴대폰이야. 내 와이프 전화번호 알아내서 뭐 작업걸려고?”
매우 궁색한 반박이었지만 그 말은 김계장에게 통했다. 그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이상한 미소를 실실 흘렸다.
“하여간 너 능력좋다.”
김대리의 말투는 마치 내가 은밀히 사귀는 여자로부터 선물받은 휴대폰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차라리 그편이 더 나았다.
“아무튼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다.”
“임마. 너 진짜 와이프한테 들키지나 말아라!”
입체휴대폰을 발견한 김계장 건은 그렇게해서 무마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휴대폰을 내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며칠 후 김계장 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터졌다. 그날도 나는 잠시 밖에 외근할 일이 있어서 사무실을 잠깐 비웠다.
“……!”
볼일을 보다가 문득 나는 그날이 마침 월말 결산이라는 것을 깨달자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은나는 바쁘 게 외근을 나오는 바람에 회사의 공유 드라이브에 내가 작업한 테이타를 올려놓는 것을 깜박 잊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들이 중앙컴퓨터에 반영이 안되면 내일 김국장에게 보고할 리포트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이제 10분 후에 전산실에서 사무실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공유 드라이브에 로드시켜놓은 것들을 모두 중앙 컴퓨터속으로 끌어갈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노랗게 변하는 당혹감속에 야찰과 같이 나를 노려보는 김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휴, 살았다.”
한 숨을 내리쉬며 서둘러 휴대폰의 번호를 누르던 나는 액정에 떠오른 ‘85’라는 숫자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것은 지금 내 휴대폰은 애인찾기 명령을 수행하기위해 초기화의 85%까지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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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것 웬 휴대폰이야?”
다음날 일요일, 아침이라 늦게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느긋하게 면도를 하던 나는 안방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아내의 앙칼진 물음에 흠칫 놀라며 동작을 멈추었다. 부옇게 김이 서려진 거울속에서 내 얼굴이 예상치못한 상황에 파랗게 질려있다.
“뭐?”
내가 미처 질문을 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문밖으로 쭉 내밀자 놀랍게도 아내는 어느새 문앞에까지 육박해왔다. 아직은 좀 낯설은 검은 색 휴대폰을 내 코 앞에 쭉 내민 아내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40대 초반의 주부답게 약간 탄력을 잃은 피부가 무색하게 내 눈동자를 깊이 염탐하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날카로왔다.
“당신 바지 주머니에 있던데…..”
“아, 그 휴대폰!”
정말 그제서야 그 낯선 휴대폰의 정체를 알아봤다. 피에로와 검은 선글라스을 걸친 사내들의 거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휴대폰은 지금 숨겨진 애인찾기를 수행중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때에말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려는 목소리를 사력을 다해 진정시키고는 최대한 천천히 말했다.
“어제 퇴근하다가 우리 골목길 앞에서 주웠어.”
“정말? 당신이 새로 산 것 아니었어?”
나를 살짝 치켜보는, 아내의 곱지만 매서운 눈빛이 다시 한번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번쩍이었다.
“사기는……나 휴대폰 싫어하는 것 당신도 잘 알잖아?”
“하긴…..”
아내의 눈에 수긍하는 빛이 조용히 차올라 왔다.
“당신도 정말 대단해. 휴대폰없이 사는 것 불편하지도 않아?”
난 아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고 있는 것에 일단 안심을 하며 그것이 계속 유지되도록 좀 과장돤 행동으로 대꾸했다.
“전혀! 지난번 휴대폰 고장난 뒤로 난 정말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구.”
“ 실없는 소리 말고 당신 것이나 빨리 사요. 이것 주인한테 연락했어요? “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나의 행동을 나무라는 것 같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표정을 알 수 없는 깊은 동굴로 바뀌어 있었다.
“응, 어제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마침 지방에 볼일보러 갔다고 이삼일 내에 찾으러 온대. ”
“그래?”
아내는 자신이 쥐고있는 휴대폰의 겉표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지못해 수긍하는 눈치였다. 길에서 주운 휴대폰치고는 겉표면이 너무 깨끗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번 더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한번 전화해봐.”
“나도 바뻐요. ”
“그 휴대폰 주인 남자치고는 목소리 하나 죽이더라구. 또 알아? 휴대폰 찾아주었다고 근사한 답례를 할지도,”
“이 양반이 정말 미쳤나? 됐거든!”
남녀관계에 있어서만큼 확실한 성격의 아내는 얼른 휴대폰을 내게 떠안기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정체불명의 휴대폰과 나의 행적에 대한 그녀의 의혹이 완전히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안방으로 얌전히 들어갈 줄만 알았던 아내가 갑자기 홱 돌아서서는 나에게 말한다.
“그거 정말 대포폰 아니지?”
여자의 육감은 정말 예리하고 무서웠다. 그녀의 본능은 이미 그 수상한 휴대폰의 정체를 훤히 꿰뚫고도 짐짓 능청을 떨며 나를 다시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무리 집에서 살림만 하고 산다해도 요며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청와대의 모 정책실장과 그의 애인 사건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의 스캔들에서도 대포폰이라는 것이 은밀하고 중요한 역활을 했었단다.
어느 정도 안도하고 있던 참이라 나는 핵심을 찌르는 아내의 질문에 한순간 숨이 콱 막혀 죽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직접 확인해보라고. 젠장,”
그 순간에 나는 속으로는 떨면서도 겉으로는 당신 알아서 하라고 통크게 밀어부쳐야 했다. 그것이 다행스럽게 약발이 있었는지 아내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제방으로 들어가려던 아내는 마침 거실 TV 의 뉴스에 등장한 문제의 청와대 모 정책실장의 얼굴을 가리키며 마지막 경고의 내게 날렸다.
“저놈처럼 딴짓하면 죽을 줄 알아!”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이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아내는 자신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는 방안으로 쓰윽 들어갔다. 그녀의 뒷꼭지에 대놓고 나는 공갈을 쳤다.
“젠장,진짜 나도 애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아!”
그녀는 내 협박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쿵쾅거리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여보, 어제 그 휴대폰 아직도 갖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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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숨어있었는지 갑자기 피에로가 뛰쳐나왔다. 나를 향해 그대로 달려오는 피에로의 몸이 내게 닿는 순간 나는 그의 손이 내 바지뒷주머니속으로 재빠르게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나를 지나쳐 저만치서 뒤돌아선 피에로의 손에는 내 지갑이 들려있었다. 피에로는 싱긋 웃으며 내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멋있게 한 장 뽑아냈다.그리고 손가락으로 지갑을 다시 튕겨보냈는데 신기하게도 지갑은 포물선을 크게 그리며 날아와 내 뒷주머니에 다시 정확하게 꽂혔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내가 어찌된 영문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 사이 피에로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총총히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이런, 젠장,”
물론 진작에 지불했어야 하는 돈이었지만 삐에로에게 거의도둑맞 듯 털려버리자 내 입에서는 욕설이 저절로나왔다.
“싸게 주었으니까 선전이나 잘해줘.”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삐에로의 소리가 어두운 골목에서 다시 나오자 나는 얼른 제 자리에 섰다. 혹시나 피에로의 행적을 알아챈 검은 선글라스들하고 다시 마주칠까봐 서였다.나는 피에로를 추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신경을 바짝 세우며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밤 나는 아내 몰래 문제의 휴대폰을 꺼내서는 마침 비어있던 아이들 방으로 들어갔다.겉으로봐서는 무척이나 평범한 휴대폰이었지만 지하상가에 벌어진 그 총격상황이 자꾸 마음에 불안하게 다가왔다,
인파가 붐비는 시간대에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비무장한 민간인에게 마구 총질을 하다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내 손에 얌전히 놓여있는 휴대폰은 어쩌면 선글라스의 사내들에게는 민간들인들을 사살해서라도 회수를 해야할 만큼 중요한 물건일 지도 모른다.
“……!”
하여간 휴대폰의 겉모양을 유심히 뜯어보던 나는 마침내 망서리던 마음을 접고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맑은 음이 흘러나오면서 휴대폰 제조사의 로고가 LCD창에 화려하게 떠올라왔다.
“먼저 저희 입체 휴대폰를 구입해주신 고객님께 감사드립니다. “
마치 달콤한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듯한 여자의 나긋 나긋한 음성이 방안을 감미롭게 울렸다. 단순한 녹음용 목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내 옆에 붙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매력이 넘쳐흘렸다. 나는 야릇한 흥미를 느끼며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다음 말을 기대했다.
“본 제품은 고객에게 숨겨진 애인을 찾아드리는 최첨단 입체 휴대폰입니다.”
(……!)
” 먼저 전원을 켜고 본 휴대폰에 장착된 초정밀 센서인 렌즈를 향하여 고객님의 눈동자를 비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모든 절차는 끝납니다.”
나는 얼른 휴대폰의 액정 위에 움푹 패여져 있는 렌즈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인식했는지 그토록 무심하게 보이던 렌즈에서 붉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단 주의하실 점은 초기화가 진행되는 100일 동안은 절대로 본 휴대폰으로 통화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 기간중에 통화를 하게되면 숨겨진 애인을 찾는 모든 초기화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
(그까짓 거 뭐 어렵다고 또 잔소리야.)
피에로에게 이미 듣은 경고였지만 다시 그것을 접하게 되자 나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원래 휴대폰 사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게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 조건이야말로 ‘전설의 고향’에서 여우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 100일동안 날고기를 먹지말아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기에 나는 그 조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
내가 한동안 렌즈에서 시선을 떼지않자 센서는 마침내 노란색 가느다란 광선을 내 눈속으로 쏘았다. 그후 액정밑의 빈 동그라미 속에서는 차례로 地(지), 畜(축),餓(아),隧(수),人(인), 天(천),聲(성),緣(연),菩(보),我(아)라는 한자(漢字)가 떠오르며 원을 가득 채웠다. 그 위를 따라 파란 불빛이 순차적으로 조용히 돌기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청자빛 바다같았던 액정 한 가 운데에
‘손님의 마음을 복사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보름달처럼 떴다. 뒤이어 예의 정감넘치는 고운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고객님께서는 통화 버튼을 눌러주시겠습니까?”
“까짓것, 밑져야 본전이다.”
이윽고 나는 장난기와 모험심이 발동한 손가락으로 목소리의 요구대로 통화 단추를 꾹 눌러주었다.
“감사합니다.”
나의 선택에 무척 들뜬 듯한 여자의 말이 낭랑하게 방안을 맑리며 아쉽게 사라지자 휴대폰은 내부에서 뭔가 작동하는 듯 기계음과 함께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휴대폰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나도 숨겨진 애인찾기를 시작한 휴대폰을 그냥 내 바지 주머니에 푹 쑤셔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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