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레벨 업 - 제25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작(고학년) 창비아동문고 317
윤영주 지음, 안성호 그림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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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레벨 업》은 VR게임과 현실의 대조를 통해 진짜와 가짜 현실, 진정한 자유, 그를 위한 삶과 죽음을 통찰하는 흥미진진한 SF 장편동화이다. 아이들에게 익숙한 게임이라는 소재, 학업과 학교폭력의 억압, 자식을 통제하고 보호하기만 하려는 부모와 그들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아이의 관계, 흡입력 있는 스토리와 문장이 어우러져 가상현실처럼 짜릿하고 찬란하면서도 현실의 무게감까지 잡아내는 동화가 탄생했다.

 

가상현실은 이제 창작물에서도 현실에서도 보편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상현실 윤리와 가능성, 한계점을 놓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가상현실 속으로 어디까지 빠져야 하고 어디에서 빠져나와야 하는가. 가상현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바꿀 수 있는가. 아직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게임 속 세상은 오색찬란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국가를 평정하는 군주가 될 수도 있고, 초인간적 힘을 발휘해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모든 이의 동경을 한몸에 받는 유명인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의 자신와 달리 근사한 외모와 출중한 능력을 가진 게임 속 나의 분신, 그리고 적절하게 주어지는 임무와 보상. 게임은 현실의 억압으로 지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이런 이유로 현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게임 속으로 도피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잘 만들어진 가상현실을 이상향으로 여기는 삶. 그런 삶은 부도덕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을 갉아먹고 병들게 할 것이 틀림없다. 결국 현실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대안현실이 주는 달콤한 가짜 자유에 갇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학업과 인간관계, 사회의 억압과 폭력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고, 가짜 현실로 도피하지 말고 진짜 현실을 어떻게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고. 물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만 보면 가상현실이 훨씬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려면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야만 한다. 물론 그만큼의 용기를 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삶을 살다 보면, 이상향 속 가짜 자신이 아닌 진짜 자신으로 살게 될 테니 말이다.


※이 서평은 창비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자유가 대체 뭘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무도 나를 통제할 수 없는 것?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 숨이 시원하게 쉬어지는 것? - P91


"선우야. 나는 네가 부러워. 너한테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다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말이야. 꽃이 시드는 세상이 부럽고, 배고픔을 느끼는 네 몸이 부러워. 너는 성장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잖아. 하지만 나는....."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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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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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사회의 거대한 뿌리이자 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계급·조직 위주의 불평등한 문화가 형성된 원인을 기존에는 유교의 영향 등으로 뭉뚱그려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서구 사회의 선진 문명에 대한 동경만 키울 뿐,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그를 이루는 토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완전한 해답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동아시아인이 위계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그 시스템에 오랫동안 따라 살아온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와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성리학이 아무리 시대가 지나며 교조화되었다고 해도, 상류층이 주로 연구하던 교리가 모든 계층에 빠른 시간 내에 두루두루 스며들 수 있었을까?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실생활과 밀접한 요인이 있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러한 불평등 구조의 기원이 다름 아닌 동아시아의 주식 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저자의 신간 , 재난, 국가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이루는 세 가지 축을 제목에 한눈에 들어오게 담아냈다. 언뜻 보기에 밥상에 오르는 쌀과 불평등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량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떠올리면, 쌀이 곧 우리의 의식을 형성하는 요소라는 걸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쌀이 한국인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한다, 빵은 밥과 달리 속이 안 차서 영 끼니 같지 않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한다. 한국인은 매번 쌀을 찾고, 여느 동아시아인 못지 않게 쌀을 사랑한다. 하지만 쌀을 오로지 식문화의 일부로만 여겨왔을 뿐, 사회의 가장 큰 축이라는 사실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쳐 왔다. 교과서에서 두레와 품앗이가 상부상조하고 우애를 다지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정신이라고만 가르쳤을 뿐, 어떤 문화적 배경을 두고 탄생한 것인지, 그 일면에는 어떤 그림자를 품고 있는지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우리의 의식 깊숙하게 자리잡은 쌀의 존재와 그 생산 체제가 사회에 미친 영향, 그에 따라 국가에게 부여된 재난 관리 책임, 공동체 위주의 생산 체계과 현재 한국 노동시장의 큰 틀인 연공제, 과도한 경쟁의 원인, 위계질서의 불합리성을 타파하고 세계 시장에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방안까지 총망라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이 다루는 문제를 분명히 정리하여, 독자가 책을 읽어나갈 방향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짚어준다.


결국 서로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경쟁하고 연륜을 강조하는 정신, 한국인이 민주화를 이루어냈음에도 위계에 집착하는 이유, 불평등을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론 불평등에 기대고 있는 한국인의 모순은 결국 쌀 농사에서 뻗어나온 부정적 일면이라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우리 안에 내재된 모순을 헤쳐나갈 수 있을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비로소 실마리가 보이게 될 것이다.



*이 리뷰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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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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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조선 한복판에 뱀파이어가 나타난다. 언뜻 듣기에 부자연스러워 고개를 갸웃거릴 법한 이 설정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확장되는 소설이 바로 1931 흡혈마전이다. 이 소설은 아몬드, 버드 스트라이크등 청소년 소설로 독자의 신뢰를 얻고 있는 창비와 장르문학 플랫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카카오페이지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중 우수상을 수상한 김나경 작가의 장편소설을 엮은 단행본이다. 사전 연재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6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를 기록하며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 소설에서는, 일제강점기와 그 시절 여학교에 대한 탄탄한 자료 조사를 통한 사실적인 배경과 그 위를 활보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한 인물들이 절묘한 시너지를 느낄 수 있다.

경성에 있는 진화여자보통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희덕은 새로 들어온 기숙사 사감 선생인 계월이 동료 교사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던 희덕이지만 계월이라는 이를 알아갈수록 그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해 간다. 풋내기 1학년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용기 있게 밝히는 솔직한 성격의 희덕과 모종의 동기를 이룰 목적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계월이 스토리 라인을 쾌활하게 달려나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이 소설이 여느 뱀파이어물과 구분되는 독특함은 식민지 여성두 명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점에 있다.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자신에게 허락된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라고 밝혔듯, 일제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으로서, 남성에게 억압받는 여성으로서 이중으로 자유롭지 못하던 두 주인공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뭔지 매 순간 고민한다. 눈앞의 세상이 주는 세뇌에서 벗어나 점차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어디로든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모습은 가정에 묶여 있던 20세기 이전 여성들에게 그들이 조금이라도 자유를 누렸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이 정성스레 담긴 선물과 같다.


 

*이 리뷰는 창비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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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전사 소은하 창비아동문고 312
전수경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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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빛 전사 소은하>

 

이 리뷰는 창비 서평단으로 지원받은 도서를 읽은 후 작성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줄 SF동화

2019년부터 SF 소설이 전에 없이 각광받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힘입어, 아이들을 위한 SF 동화가 출간되었다. SF에 입문한 20대 독자로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SF라 하면 체계적이고 어려운 과학 지식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장르라 생각해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고, 전형적인 문과생인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정작 SF에 발을 들이고 나서는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고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SF 동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SF는 무한을 꿈꾸는 상상력을 토대로 하는 장르이지 결코 딱딱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책이 이 세상에 한 권 더 생겼으니. 실제로 책을 받아 읽어 보니 기대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기쁨은 더욱 배가 되었다. 이 책으로 처음 SF를 만날 어린이 독자들이 부러웠고, 무한하게 부풀 그들의 세계를 축복하고 싶었고, 이 소설을 쓰신 작가님께 어린이들이 꿈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난 지구를 구하러 가야 되거든.”

<별빛 전사 소은하>의 주인공인 소은하는 상위 티어에 속할 정도로 게임 실력이 매우 뛰어나지만, 그 외에는 도드라지는 면이 없는 평범한 초등학교 6학년이다. 눈치가 없고 언행이 특이하다고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붙고 학급에서 조금 겉도는, 조금 외로운 면이 있지만 친한 친구 소령과 게임 친구인 기범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사실 지구인이 아니라 헥시나라는 머나면 별 출신인 외계인임을 알게 되면서 평범하던 은하의 삶에는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은하는 자신이 즐겨 하던 유니콘피아가 실은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외계인의 공작임을 알고 평화를 지지하는 헥시나인들과 힘을 합쳐 지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초반에는 아이들의 말에 위축되던 은하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숙해지고, 후반부에선 반 친구들 앞에서 의연하게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그 작은 아이가 어느덧 의젓한 히어로로 성장했음을 드러내 감동을 준다.

아이가 세상을 구한다는 소재는 언뜻 보면 오랜 세월 온갖 매체에서 쓰인 흔한 클리셰이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는 빠지지 않고 어린이 히어로가 등장한다. 어린 아이에게 어른도 감당 못 할 너무 큰 짐을 지운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청소년 히어로는 매력적인 존재로 아이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세상을 구하는 근사한 히어로가 자신과 똑같이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는 아이라는 사실은 어린이 독자에게 자신을 히어로에게 이입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위기를 극복하며 이들에게 원대한 꿈과 어떤 고난이 와도 최후의 희망을 믿고 해내는 의지, 최후의 선을 믿는 따뜻한 마음씨를 불어넣는다. 주인공이 당당한 영웅적 자질과 현실 속 아이로서의 사실성을 겸비할 때 히어로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된다. 주인공의 언행을 모방하는 놀이를 하거나 일상 생활에서 주인공이 했을 법한 선하고 용감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내 친구 히어로

소은하는 이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될 캐릭터이다. 은하는 학급에서 겉돌아 위축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아이들의 인기를 받았을 때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옛날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마냥 밝고 기운차지 않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사건을 관망하고 현명하게 분석하는 성격도 이 캐릭터의 사실성에 한몫한다. 무엇보다 은하는 게이머로서도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게임을 하루종일 붙잡고 클리어에 매달리는 것보다 조금씩 꾸준히 연습해서 감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승급전에서도 유저들 간의 매너를 지킨다. 또한 은하는 단순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정당한 니즈를 요구하는 고객이자 세상을 구하는 힘이 있는 영웅으로 서술된다. 마냥 순수한 어린아이가 아닌 현실적인 초등학생 캐릭터 소은하는 어린이 독자들의 공감대를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은하뿐만 아니라 다른 어린이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매력적이다. 은하의 친구 소령은 초등학생에게도 자기 주장을 할 인권이 있다고 말하고, 게임 친구 기범은 은하와 연애 감정을 느끼는 대신 든든한 동료로서 애인보다 더 끈끈한 신뢰 관계를 은하와 형성한다. 달콤한 환상보다 각자의 개성과 발언, 자신을 믿는 용기를 존중하는 2020년대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끝으로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할 수 있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부럽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전하고 싶다. 물론 내가 어린이였을 적에도 마음을 풍요롭게 했던 동화는 많았지만, 이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어린이가 읽으면 얼마나 더 생생하고 짜릿할까 싶어 조금 샘이 난다. 그 정도로 재미있는 동화다.


#별빛전사소은하 #어린이책 #한학기한권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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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이랑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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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밥 한 끼를 사 먹더라도 아무리 싼 식당에 찾아가도 6천 원은 넘는 돈을 내야 한다. 입고 먹고 자는 모든 비용을 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직장에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흔히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하는 사람들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직업 만족도와 성취감을 중시하기 때문에 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역시 항상 돈에 목이 말라 있다. 이런 오해에 묶여 끊임없이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사람들을 대표할 직종은 역시 예술계 종사자일 것이다. 저자 이랑 역시 영화 감독, 음악가, 작가를 겸하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예술계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값으로 업계 관행때문에 한참 적은 돈을 받고도 제대로 시정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적은 임금 때문에 프리랜서 예술가들은 더더욱 돈에 목이 말라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돈을 번다. 보통 직장이라면 급여가 너무 적은 곳을 떠나오기 마련이지만 예술가들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예술을 놓지 못한다. 이런 예술계 노동의 악순환은 이곳저곳에서 언급되었기에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구체적인 수치로 나는 얼마를 번다, 돈이 더 필요하다고 자신의 정보를 선뜻 드러내는 예술가는 최근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명망 있는 여성 예술가인 이랑 작가가 예술에도 돈은 필요하다라는 말을 책을 통해 이 문제를 가시화하는 선두 주자에 섰다. 작가는 자신의 자금 부족한 자금 사정과 하는 일들,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선다는 솔직한 의견, 돈의 원리를 공부하다가 금융 공부까지 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써서 책으로 엮었다. 더 많은 예술가들과 보수 기준과 협상 요령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랑 작가는 영화, 음악, 글 등 다방면에서 이야기를 짓는 아티스트이지만, 대중에게는 흔히 인디뮤지션으로 알려져 있다. 2신의 놀이로 큰 음악적 업적을 이루었으며, 특히 수록곡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인디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어봤을 유명한 곡이다. 이 앨범으로 이랑 작가는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수상했다. 누가 봐도 그의 예술 행보가 빛나는 영광스러운 순간. 그러나 이랑 작가는 단상에 올라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받은 트로피를 이 자리에서 경매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한 달에 100만 원이 안 되는 수익으로 어렵게 아티스트로서의 생계를 이어가는 중이었는데 이 상에는 상금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날 저자는 부귀영화에서 영화는 누렸을지언정 부귀는 누리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트로피를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초대석에 앉아 있는 이들 모두 저자와 처지가 같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지갑은 두툼하지 못한 예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명예의 상징인 트로피를 앨범 제작사 대표에게 50만 원에 팔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1부 중에서도 첫 꼭지에 수록된 이 이야기는 이랑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예술을 한다는 명예 때문에 불안정한 수입에 묶여 산다는 혹독한 현실을, 그리고 저자는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필요를 남에게 말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이 입고 먹고 자는 일에는 언제나 돈이 있어야 하고, 이는 프리랜서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얼마를 받는다는 사실을 터놓고 얘기하는 이는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자꾸 돈 얘기를 하느냐?”라는 핀잔을 잊을 만하면 들려왔고, 동료 뮤지션에게는 너는 왜 돈 얘기만 하느냐, 아티스트답지 못하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꿋꿋이 노동에 부합하는 보수를 받아내어 자신을 챙기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무상으로 하던 인터뷰에 페이를 요청하고, SNS에 자신과 함께 노동하기 위한 요금을 공개했다. 공연에서 티켓값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공연 후 자신의 앨범과 사인을 적극적으로 판매한다. 코로나19로 수입의 대부분이던 공연과 강연이 끊기자 저자는 좌절하는 대신 돈의 흐름을 공부하기 시작해 금융 회사에 들어갔다. 현재 저자는 트위터에서 스스로를 금융예술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영화를 비롯한 예술밖에 모르던 사람이 금융 회사원이 되었다니 실로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다. 돈을 쫓으며 살다가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일은, 저자가 금융인의 세계에 입문하고도 여전히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록 예술업계의 낮은 임금으로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예술을 아예 놓지는 않았다. 이를 깨달으니 비로소 예술은 저자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기존의 임금이 좀 더 넉넉했더라면 저자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었을까. 아니, 업계 환경이 괜찮았더라도 코로나19 앞에서는 무슨 대책이 있었을까. 거꾸로 예술만 알던 사람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게 되었으니 축복할 일인가. 어느 것도 의미 없는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것은 저자는 언제든 예술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 항상 제작비가 따라다닐 뿐.

 

언제나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독자에게 고백하는 저자의 말투는 덤덤하다. 수입이 적다고 부끄러워하며 저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그래도 나는 현실에 찌든 사람들과 달리 예술을 한다며 자아도취하지도 않는다. 그저 노동하는 만큼의 보수를 받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이 얼마인지 알리고, 받은 돈의 가치만큼 열심히 일할 뿐이다. 그리고 예술 노동은 그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어느 정도로 가격이 매겨져야 하는지 고민한다.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해결 방안을 찾아서 움직이고, 도착한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동분서주하는 저자를 보며 독자는 자신의몫을 쟁취하는 책임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다만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제목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아쉽다. 1부의 꼭지들은 모두 일과 돈의 상관관계라는 뚜렷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2부에서부턴 제목과 다른 내용이 나오기 시작한다. 2부에서는 예술인으로서 사는 삶, 3부에서는 그 중에서도 여성 예술인으로서, 몸과 젠더 때문에 치렀던 여러 경험과 갈등을 다룬다. 4부는 앞 장들에 비해서 꼭지들의 유기적이지는 않지만, 저자와 유대감을 주고받는 존재들과 그들을 향한 저자의 사랑이 듬뿍 묻어난다. 이들 모두 솔직담백하고 재치 있는 저자의 톤이 잘 묻어나며 현대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젠더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히 로서 존재하는 과정이 감동을 준다. 이처럼 재미와 시사성 모두를 잡은 깊이 있는 글이지만, 제목만 보고 아티스트의 생계 이야기만을 기대하고 책을 펼친 독자가 느낄 거리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이랑 작가의 생각이고 분신인 건 맞지만 돈이 필요하다는 말과 모두 방향이 일치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프리랜서 노동자로 먹고사는 이야기라는 카피가 제목과 내용을 절충하고 있긴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랑이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지금이었던 건 아닐까. ‘노동자가 제목에 들어가고 부제에 이랑이 들어갔으면 책의 정체성을 바로 알 수 있는 표지가 나왔을 법하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하다는 말에 눈길이 안 갈 사람은 없으니, 마냥 나쁜 제목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 같은 경우는 이랑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웠지만 예술업계 노동자의 이야기만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으니, 혹시 구매를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창비 서평단으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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