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 짓기
정재민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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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간되는 대부분의 책에는 띠지가 둘러져 있다. 띠지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홍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눈에 띄거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문구를 쓰는게 대부분이라 지금까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띠지에 적힌 문구가 절실히 와 닿았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야기는 시작된다!"

말 그대로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 오히려 이야기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만일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맨 앞 장부터 다시 읽게 된다면 분명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갈래이며, 시대 또한 2010년대와 1960년대로 나뉘어 있다.

2010년대의 주인공인 나의 이름은 '이재영'이다. 스릴러 작가로 네 편 정도 책을 냈지만 첫 작품이 흥행한 이후로 계속해서 부진했다.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내 책의 문제는 사건만 있을 뿐 인물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으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우연히 들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뺨부터 귀까지 엉겨 붙은 화상에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공터만 남아있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의 사연이라면 내 작품의 소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남자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남자의 이름은 '김정인'으로 직업은 사회복지사였다. 3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약속받고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자는 갑자기 돌변해 테이블에 내 머리를 쳐박고는 떠나버린다. 그 후 나는 그에 대한 복수심과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뒤를 캐기 시작하고, 드디어 한 복지관에서 일하는 그를 찾아낸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는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노인들에게 다정하고 책임감 강한 복지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 성실해 보이는 복지사의 얼굴 뒤에 그 때 내가 봤던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습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뒤를 집요하게 쫓기 시작한다.

1960년대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탄광촌에 '서희연'이라는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 유난히 희고 예뻤던 아이는 만취해 엄마를 때리는 아빠와 사람들을 피해 집에서만 지내는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외지로 나와 간호대를 다니며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사채놀이를 하는 어머니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 남자와 미래를 꿈꾸지만 고향인 도계로 돌아간 어느 밤, 그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그녀는 남자와 예정된 결혼을 해 아들을 낳고 평온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씻을 수 없는 그 날의 상처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며 망령처럼 주위를 맴돈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던 그녀는 결국 누구보다 엄마를 이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처음에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수상한 남자와 그 남자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사건보다는 인물의 세밀한 감정 묘사에 충실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초반 도입부에 풍겼던 위험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와는 달리 개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어찌보면 기대보다 밍숭맹숭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하지만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고해서 절대 이야기가 재미없거나 심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롭게 묘사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밍숭맹숭하다고 한 것은 이 소설에서 어떤 이야기를 예상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일 나처럼 범죄에 얽힌 사건 위주의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그것과는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야기는 두 시대를 걸쳐 진행된다. 2010년대 이재영이란 인물의 이야기에서는 미스터리한 복지사 김정인의 실체를 추적하는데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지만 1960년대 이야기에서는 서희연이란 소녀의 일대기를 그려내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이야기는 희연의 유년시절을 거쳐 성인이 된 이후의 삶까지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 소녀가 다른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실 아무 관련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긴 페이지를 할애할 리는 없지만 어떤 연결관계가 있는지는 중반이 훨씬 지나서야 슬슬 가닥이 잡힌다. 희연이란 인물에 대한 이런 구체적인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소녀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고 이는 곧 그녀와 관련된 어떤 인물에 대한 이해로 번진다.

결정적으로 소녀의 이야기에 몰입해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독자들이 머리속으로 예상하는 결말이 떠오르는데, 실제 결말이 그런 독자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부수기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한동안 멍해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두 주인공 중 이재영이란 작가의 이야기보다는 희연의 사연이 더 몰입감 있게 읽혔다. 희연의 일대기를 마치 영화처럼 상세히 묘사해 놓은 이유도 있지만 그녀의 삶이 그 시대를 살아왔던 여성의 아픔과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재영의 이야기는 쉽게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김정인에 대한 취재가 복수나 호기심이라는 감정으로 설명하기에에는 지나치게 집요해 오히려 김정인이라는 인물보다는 이재영이란 인물이 더 수상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억지스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맨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재영이 왜 그렇게 김정인에게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맨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쉽사리 결말을 예측하기 힘들지만 사실 알고보면 작가는 친절하게 처음부터 힌트를 주고 있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 맨 앞 장에 있는 이 한 문장이 500 페이지 전체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세지이자 결말에 대한 실마리이다. 

 


"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 사이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다. "

_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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