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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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일본 추리소설에서 단골로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 밀실과 살인사건인데 이 소설에도 역시나 밀실 상태의 집안에서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런 경우 보통 범인이 어떤 트릭을 써서 밀실을 만들어 교묘히 빠져나갔는지 밝혀내는 것이 관건인데 이 소설은 그런 트릭을 밝혀내는데 집중하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어떻게 밀실이 만들어졌고,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심리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 그런데 문제는 등장인물의 심리가 범상치 않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주인공의 심리가 굉장히 음울하고 어둡다. 발표하는 매 작품마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악惡 을 테마로 하는 작가답게 이번 작품도 역시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남성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신견'으로 그는 어린시절 자신의 또 다른 인격에게 R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R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어둠과 악의 마음을 떠안고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지라 그의 심리는 어딘지 일그러져 있다.


이야기가 시종일관 신견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싫어도 주인공의 마음을 읽을 수 밖에 없어 읽는 내내 불쾌함과 음울함,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 읽었던 「교단 X」나 「악과 가면의 룰」에서도 그랬지만 본인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악의를 가진 인간의 처연한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주인공인 신견이나 일가족 살인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나에나 어딘가 비뚤어져있고 음울해서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왠지 처연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무작정 미워할 수가 없다. 게다가 등장 인물 중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감정을 이입할만한 다른 인물이 없어 더 가치관에 혼란이 오기도 한다.


22년 전 일가족이 밀실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누가 봐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내, 그런 아내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항상 감시해왔던 남편, 이런 가족들 속에서 엄마를 빼닮은 여동생에게 비뚤어진 성적 욕망을 풀던 오빠. 그리고 벽장 속에서 수면제를 마신채 잠들어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사나에.

신견은 우연히 한 바에서 중학교 동창인 사나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그 이후 신견을 찾아온 탐정을 통해 사나에의 전 애인이 실종되었고, 그 남자도 사나에의 동창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견은 사나에와의 만남이 정말로 우연인지, 그리고 사나에의 전 애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고, 22년 전 그 사건의 진실에도 점점 접근하게 된다.


탐정이 찾아왔다는 점에서 혹시나 이 탐정이 22년 전 그 사건을 파헤치는 정의의 사도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 탐정도 어딘가 망가진 인물로,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싶어하는 나약한 사람일 뿐이었다. 물론 이 탐정 덕분에 그 날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었지만 탐정은 결말에 다다르기 전에 발을 빼버렸고, 결국 사건의 진실은 수사 끝에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백으로부터 드러나게 된다.

그나마도 마지막에는 드러난 사건의 실체가 진짜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미궁에 빠지면서 제목 그대로 독자들을 미궁에 빠트리지만 사실 이 소설에선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된 인물들이 심리적으로 어떤 변화를 맞게 되는지,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이 있을지에 대한 의문만이 남는다.


본격 추리 수사물과 사건의 트릭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씁쓸한 뒷맛만을 남기는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인간 내면의 깊이 자리잡은 불안과 악의,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대한 심리묘사에 집중한다면 예상치 못한 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지 못했잖아? 어릴 때 사랑받지 못했잖아···.

그냥 그것뿐인 일인데도 이토록 엄청난 일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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