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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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회사 생활을 한지도 10년이 넘어가고 회사에서도 제법 짬밥(?)이 되니 더 이상 눈 앞의 일에 급급하기 보다는 내 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진짜 회사에서 필요한 일인지, 쓸데없는 보고서 만들기와 실적 부풀리기는 아닌지, 그리고 이 일을 퇴직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등등 삶과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바쁨과 일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이 많다는 것에 대해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었다. 오히려 회사에서 뭔가 대단한 업무를 맡고 있고, 능력 있는 직원이 된 것 같아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연차가 쌓이자 반복되는 업무가 능숙해졌고, 자연스레 점점 시간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바쁜 것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한가한 것 = 일이 적음 = 논다' 라는 인식에 괜히 뭐라도 하는 척하고, 쓸데없이 보고서 꾸미기에 더 치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진짜 필요한 업무인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마음 한 켠에 불편한 마음이 쌓이고 있던 찰나 만나게 된 것이 「가짜노동: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였다.

책 제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듯이 이 책의 주제는 가짜노동이다. 저자가 말하는 '가짜노동'이란 '하는 일 없이 바쁘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하는 일' 을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가짜노동이 단순하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월급 루팡, 월급 도둑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업무 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하거나 쇼핑을 하는 것과 같은 누가봐도 회사 일과 관계 없는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아무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보고서를 만든다던가, 결론 없는 회의를 오랜시간 하는 것과 같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허위노동, 허위로 할 일을 만들어내는 행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반드시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는 활동들, 노동과 유사하지만 사실 무의미한 업무들을 말한다.

2부 사라진 의미에서는 저자가 이런 가짜노동을 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 세계적인 회계 법인의 대표가 로고를 바꾸라는 지시를 하자 각 나라의 담당자가 모여서 색깔을 정하고, 이름을 줄이고, 전략 회의를 하고, 수 천장의 웹페이지에 로고를 적용하는 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낭비됐는지에 대한 사례도 등장하고, 외과 병동에서 환자를 상담하고 처방전을 작성할 때마다 백개가 넘는 질문에 답을 입력해야만 하는 디지털 시스템 때문에 정작 환자를 제대로 볼 시간이 부족한 의사의 이야기도 소개한다.

오히려 반대로 근무시간에 비해 업무가 너무 빨리 끝나서 쓸데없는 기획이나 보고서를 작성하며 시간을 떼우는 경우도 있었다. 한 자문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례자는 회사의 새로운 이름을 생각해내느라 6개월을 쓰고, 이름 후보를 모으고 검토하고, 도메인 네임을 사는데 얼마인지 확인하느라 한 달 가까이 소비하고도 6년째 회사의 이름이 그대로인 경우도 있었다고 토로한다.

사용자가 아닌 시스템을 위한 해결책이 오히려 가짜노동을 부추기는 일도 있고, 실제 업무량이 많지 않지만 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경우 등등 가짜노동을 포기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가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저자가 지적한 바쁨을 숭배하는 우리 사회의 기조에 대한 내용이 인상깊었다.

바쁜 것이 좋고 필요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가짜노동을 낳는 합리화 중 하나이다.

~

세 번째 의심스러운 합리화는 생산성과 노동시간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는 관념이다.

이런 합리화는 어떤 근거도 없으며, 아마 전적으로 틀렸을 것이다.

p152

마지막 3부 시간과 의미 되찾기에서는 가짜노동에 매몰돼 있는 우리의 시간을 해방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데 가장 먼저 인간은 대체 왜 일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야기한다.

■노동의 동기 _ 인간은 왜 일하는 걸까?

1. 생존: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일한다.

2. 돈: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3. 본질: 인간의 본질은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요작용하는 행위를 수행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일한다.

4. 적응: 인간은 지배적 정상성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얻는다.

5. 타인의 인정: 타인이 내가 만든 것을 필요로 하여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내 노동의 가치를 알아주기 때문에 일한다.

6. 자신의 인정: (돈 받는) 일을 할 때만 가치있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일한다.

7. 청교도적 노동 윤리: 게으름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청교도의 직업윤리 때문에 일한다.

8. 대안의 부재: 달리 뭘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한다.

9. 불안 저지하기: 할일 없음의 공포와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일한다.

최근 파이어족과 은퇴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회자되면서 은퇴 이후의 생활과 활동들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고 생각해둬야 한다는 조언들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막상 은퇴 시기가 코 앞에 닥쳐오기 전까지는 현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회사를 다니지 않을 때 뭘 할 수 있을지 탐색하는 것을 미루게 된다. 물론 실제로 바빠서 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 말곤 달리 뭘 할수 있을지 막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 시기가 올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을 잊기 위해 오히려 일을 더 열심히, 바쁘게 하게 된다는 것이 위에서 이야기하는 노동의 동기 중 대안의 부재불안 저지하기에 해당한다.

사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 동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막상 대안도 없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냥 하던 관성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이런 가짜노동에 쏟을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성을 위해 써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적으로, 조직과 관리자로서, 사회 전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이젠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것과 '불완전함을 감수한다' 는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이젠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은 자신의 성과나 회사의 이익보다 좀 더 큰 그림을 보고 직업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라면 병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들의 건강을 위해, 변호사는 법무법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 교사라면 학교가 아니라 교육과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에 집중하는 것은 결국 노동의 의미를 되찾고, 우리 존재의 본성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완전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본인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뻥튀기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을 대충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이미 충분히 잘 작동하고 있는 것들에 별거 아닌 개선을 더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 밖에도 회의는 무조건 짧게, 눈치보지 않고 퇴근하기, 노동을 시간으로 계량하지 말것 등등 변화를 위한 여러가지 전략을 제시하는데 덴마크의 노동시장과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의 차이로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여러가지 전략 중 본인이 실행 가능한 것들만 실천해 보더라도 개인에게는 큰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가짜노동에서 벗어나 진짜 노동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찾고 개인의 자존감을 되찾는데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회의감이 들고, 회사 생활이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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