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회사 생활을 한지도 10년이 넘어가고 회사에서도 제법 짬밥(?)이 되니 더 이상 눈 앞의 일에 급급하기 보다는 내 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진짜 회사에서 필요한 일인지, 쓸데없는 보고서 만들기와 실적 부풀리기는 아닌지, 그리고 이 일을 퇴직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등등 삶과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바쁨과 일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이 많다는 것에 대해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었다. 오히려 회사에서 뭔가 대단한 업무를 맡고 있고, 능력 있는 직원이 된 것 같아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연차가 쌓이자 반복되는 업무가 능숙해졌고, 자연스레 점점 시간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바쁜 것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한가한 것 = 일이 적음 = 논다' 라는 인식에 괜히 뭐라도 하는 척하고, 쓸데없이 보고서 꾸미기에 더 치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진짜 필요한 업무인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마음 한 켠에 불편한 마음이 쌓이고 있던 찰나 만나게 된 것이 「가짜노동: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였다.
책 제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듯이 이 책의 주제는 가짜노동이다. 저자가 말하는 '가짜노동'이란 '하는 일 없이 바쁘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하는 일' 을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가짜노동이 단순하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월급 루팡, 월급 도둑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업무 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하거나 쇼핑을 하는 것과 같은 누가봐도 회사 일과 관계 없는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아무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보고서를 만든다던가, 결론 없는 회의를 오랜시간 하는 것과 같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허위노동, 허위로 할 일을 만들어내는 행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반드시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는 활동들, 노동과 유사하지만 사실 무의미한 업무들을 말한다.
2부 사라진 의미에서는 저자가 이런 가짜노동을 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 세계적인 회계 법인의 대표가 로고를 바꾸라는 지시를 하자 각 나라의 담당자가 모여서 색깔을 정하고, 이름을 줄이고, 전략 회의를 하고, 수 천장의 웹페이지에 로고를 적용하는 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낭비됐는지에 대한 사례도 등장하고, 외과 병동에서 환자를 상담하고 처방전을 작성할 때마다 백개가 넘는 질문에 답을 입력해야만 하는 디지털 시스템 때문에 정작 환자를 제대로 볼 시간이 부족한 의사의 이야기도 소개한다.
오히려 반대로 근무시간에 비해 업무가 너무 빨리 끝나서 쓸데없는 기획이나 보고서를 작성하며 시간을 떼우는 경우도 있었다. 한 자문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례자는 회사의 새로운 이름을 생각해내느라 6개월을 쓰고, 이름 후보를 모으고 검토하고, 도메인 네임을 사는데 얼마인지 확인하느라 한 달 가까이 소비하고도 6년째 회사의 이름이 그대로인 경우도 있었다고 토로한다.
사용자가 아닌 시스템을 위한 해결책이 오히려 가짜노동을 부추기는 일도 있고, 실제 업무량이 많지 않지만 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경우 등등 가짜노동을 포기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가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저자가 지적한 바쁨을 숭배하는 우리 사회의 기조에 대한 내용이 인상깊었다.